여름 수확 뒤 뒷그루 작물 심기
[삶의 창]삶의 창
[삶의 창] 원혜덕 | 평화나무농장 농부
여름에 거두는 곡식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여름인 지금 밀을 거둔다고 하니 아니, 곡식은 가을에 거두는 것이 아닌가요? 하는 사람들도 있다. 곡식 거두는 일을 가을 ‘추’자를 넣어서 추수라고 하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우리 농장에서는 하곡, 즉 여름 곡식으로 밀, 보리, 귀리를 심는다. 밀과 보리는 가을에 심고 귀리는 이른 봄에 땅이 녹자마자 심는다. 가을에 밀을 심으면 봄에 밀과 풀이 같이 올라와서 제초가 큰일이라 밀을 귀리처럼 봄에 심어보면 어떨까 하고 봄에 심은 적이 있다. 그 밀은 여름이 되어도 이삭이 나오지 않았다. 퍼런 채로 서 있어서 베어 소를 주고 말았다. 하곡의 심는 시기는 이렇듯 가을과 봄으로 다른데 익는 시기가 6월 말로 다 비슷한 것을 보면 제때 심어주기만 하면 제때에 익는 자연의 법칙이 보이는 듯하다.
우리는 겨울 농사를 짓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겨울에 농사를 지으려면 에너지를 써야 하기에 유기농업을 시작할 때부터 그런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추위가 풀려 씨를 뿌릴 수 있는 봄이 되면 농사를 시작하고 늦가을에 여러 작물을 거두면 1년 농사를 끝낸다. 늦가을에 심어 한파를 이기며 겨울을 나는 마늘과 양파는 예외다. 그런데 농지가 한정되어 있어서 여러 작물을 어느 정도 골고루 심기에는 면적이 부족하다. 전체 작물의 수확 총량도 충분하지 못하다. 그것을 보완하는데 이모작의 역할이 크다. 한 해에 두 가지 작물을 연달아 심어 거둘 수 있으니 농가에 보탬이 많이 된다.
따뜻한 남부지역에서는 벼와 보리, 또는 벼와 감자를 심는 이모작이 가능하다. 우리 지역은 추워서 보리를 베고 벼를 심거나, 감자를 캐고 벼를 심으면 시기가 늦어 벼가 익기 전에 서리가 온다. 우리는 밀, 보리 등의 여름곡식을 거둔 다음 그 밭에 뒷그루로 바로 콩이나 들깨를 심는다. 여름 곡식을 수확하기 한 달쯤 전에 콩과 들깨 모종을 부어놓으면 옮겨 심기 좋을 만큼 알맞게 자란다.
두 주 전부터 하곡 추수가 시작되었다. 처음에 수확한 것이 보리다. 올해는 보리가 밀과 귀리보다 먼저 익었다. 작년에는 보리를 가장 나중에 베었다. 그 보리를 베어내고 바로 밭을 갈아 콩 모종을 심었다. 그다음은 귀리. 귀리도 부지런히 따라 익어서 귀리를 베어내고 역시 모종으로 길러놓았던 들깨를 심었다. 며칠 전에 마지막으로 밀을 베었다. 그 밀을 수확하고 밭을 갈아 들깻모를 심은 것이 어제다.
봄에는 좀 가물었지만 올해는 장마 중인데도 맑은 날이 여러 날 씩 지속되어 여름곡식을 무난히 거둘 수 있었다. 어느 해는 장마 중에 맑은 날이 거의 없어 다 여문 곡식이 젖은 채로 서 있다가 싹이 나 버려서 수확을 포기한 적도 있다.
뒷그루 작물은 심을 때마다 비가 내렸다. 일기예보를 봐 가며 심는 날을 정하긴 했지만 빗방울이 떨어질 무렵, 혹은 구름이 잔뜩 끼었을 때 심기 시작하여 한창 심고 있을 때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더운 여름에 해가 쨍쨍 내리쬘 때 심는 것보다는 비를 맞으며 일하는 게 더 낫다. 밖에서 보면 빗속에서 일하는 것이 안쓰러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상쾌하기까지 하다. 비 올 때 심으며 가장 좋은 건 막 심은 모종이 비를 맞는 것이다. 막 심은 작물에 비가 내리는 모습을 보는 기쁨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 논은 천수답이 거의 없고 저수지 등의 관개시설이 다 되어 있지만 밭농사는 아직도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농사짓는 사람은 자연을 존중하는 마음가짐을 절로 가질 수밖에 없다. 수고를 하되 자신의 수고와 능력을 과하게 자리매김하지 않는다.
농사는 당연히 수입을 위해 하는 행위이지만 작물을 심고 가꾸고 거두는 기쁨 또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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