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도·호주까지 참전… ‘배터리 2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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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6일 스타트업 박람회 참석차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만났다. 두 사람은 5월 15일에도 회동을 가졌는데, 한 달 만에 다시 만났다. 최근 머스크를 만난 국가 정상은 마크롱뿐이 아니다. 머스크는 6월 6일 몽골의 롭상남스라이 어용에르덴 총리와 화상으로 만났고, 6월 15일에는 로마에서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와 면담했다. 6월 20일엔 뉴욕을 방문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도 만났다. 6월 한 달 동안에만 머스크가 만난 국가 정상이 4명에 이른다는 얘기다.
정상들이 잇따라 머스크와 만나는 이유는 테슬라의 전기차·배터리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서다. 테슬라는 현재 200만대 수준인 전기차 생산을 2030년까지 2000만대까지 늘리기 위해 전기차·배터리 통합 생산 공장인 기가팩토리를 10~12곳가량 추가로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실제로 머스크와 정상들 간의 대화에는 전기차 또는 배터리가 빠지지 않았다.
세계 주요국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산업으로 배터리를 지목하고 적극적인 육성에 나서면서 글로벌 배터리 업계에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다. 큰 흐름으로 볼 때 ‘글로벌 배터리 전쟁’은 한·중·일이 먼저 치고 나간 1라운드가 저물어가고, 북미·유럽의 선진국들이 빠른 속도로 뒤쫓으면서 군웅할거식 경쟁이 이뤄지는 2라운드가 시작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특히, 가까운 나라들끼리 연합해 경쟁력을 키우려는 권역화도 나타나고 있다. 니켈의 나라 인도네시아와 리튬의 나라 호주가 손을 잡고 ‘배터리 동맹군’를 결성하기로 했다. 미국은 북미를 ‘배터리 허브’로 키우고 있고, EU(유럽 연합)는 유럽의 배터리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이런 변화에 따라 동북아권, 북미권, 유럽권, 호주·인니권 등 4극 체제로 글로벌 배터리 산업이 재편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니켈의 인니와 리튬의 호주 동맹군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는 4일 정상회담을 갖고 전기차 배터리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파트너십을 맺었다. 4대 배터리 핵심광물(리튬·니켈·코발트·망간) 중 생산량으로 인도네시아는 니켈 1위(46.4%), 호주는 리튬 1위(52.5%)다.
양국의 니켈·리튬을 함께 활용한 ‘배터리 허브’가 구축되면 글로벌 판도를 흔들 수 있는 막강한 위력을 가질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인도네시아 에너지 대기업인 인디카의 아르스자드 라지드 대표는 “인도네시아에 호주산 리튬을 활용한 배터리 제조 공장을 공동으로 세우고, 인도네시아 니켈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한 투자를 한다면 양국이 공동 제조한 배터리를 전 세계에 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미 인도네시아는 니켈의 가치를 활용하는 ‘자원 무기화’를 실행하고 있다. 2020년부터 니켈을 원광 형태로 수출하는 것을 금지했고, 대신 인도네시아 내에서 제련소를 지어 가공된 니켈을 수출하도록 한 것이다. 한마디로 ‘니켈을 쓰고 싶으면 먼저 우리한테 투자를 하라’는 압박이다. 인도네시아는 니켈을 앞세워 테슬라 공장 유치전에서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위도도 대통령은 “테슬라에 세금을 감면해주고 니켈 채굴권을 부여하는 등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 역시 보조금을 내걸고 배터리 산업 육성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올해부터 2030년까지 인도가 자국 내 50GWh 규모의 배터리 셀 제조공장을 구축하는 기업에 총 2160억 루피(3조4700억원)의 보조금을 지급하겠다는 인도 전력부의 초안을 입수해 보도했다. FT에 따르면, 인도 정부는 “배터리 제조 능력을 구축하기 위해 긴급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중국에서 막대한 분량을 수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지난달 모디 총리와 회담 후 머스크는 “테슬라가 인도에 진출할 것이며, 가능한 한 빨리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으로 몰려가는 배터리 기업들
올 들어 글로벌 배터리 기업들은 막대한 보조금을 내건 유럽으로 대거 몰려가고 있다. 대만 배터리 기업 프롤로지움은 지난 5월 프랑스 북부 됭케르크에 52억유로(약 7조원)를 투자해 초대형 배터리 공장을 짓기로 했다. 2026년 첫 가동에 들어가고, 연 75만대의 차량에 배터리 공급이 가능하도록 2031년까지 생산시설을 늘리겠다는 계획이다. 프랑스 정부는 프롤로지움 측에 상당한 규모의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프랑스에는 에너지 기업 토탈, 메르세데스 벤츠, 스텔란티스가 3각으로 합작한 공장을 포함해 4개의 배터리 공장이 3년 안에 들어설 예정이다.
유럽 최대 배터리 제조사인 스웨덴 노스볼트도 지난 5월 독일 북부 하이데 지역에 신규 배터리 공장을 건설하기로 확정했다. 사실 노스볼트는 1년 전 하이데 공장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가 보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미국이 작년 8월 발표한 IRA(인플레이션감축법)를 통해 전기차에 대당 최고 7500달러의 보조금을 주겠다고 발표하자 주판알을 다시 튀겨보려는 속셈이었다. 그러자 다급해진 독일 정부는 1억 유로(1432억원)의 보조금 지원을 약속했고, ‘선물’을 받은 노스볼트는 공장 건립을 예정대로 추진하기로 했다.
유럽에는 중국 업체들도 속속 진입하고 있다. 세계 1위 배터리 제조회사 중국 CATL은 지난해 말 독일에 공장을 완공했고, 헝가리에도 한창 공장을 짓고 있다. 중국의 SVOLT도 유럽 내 공장을 최대 5곳가량 확장하기 위해 현재 관련 당국과 논의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무역협회 김희영 연구위원은 “중국을 배제한 채 배터리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미국과 달리, EU는 늘어나는 배터리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중국의 투자 유치에 적극적”이라고 설명했다.
유럽연합(EU)은 미국에 뒤처지지 않겠다는 전략을 펴고 있다. 미국이 IRA를 발효시키자 맞불을 놓는 성격인 핵심원자재법(CRMA)의 세부 방안을 올해 안에 확정하겠다는 계획이다. ‘유럽판 IRA’로 불리는 CRMA의 골자는 배터리에 필요한 핵심 원자재의 EU 내 생산 비율을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CRMA에는 EU에서 배터리용 원자재를 생산하는 기업에 각종 인센티브를 준다는 내용이 담길 것으로 전망된다. 2025년쯤 발효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은 IRA로 두둑한 성과
미국은 이미 IRA로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다. 국제 비영리단체 천연자원보호협회(NRDC)에 따르면, 지난해 8월 IRA 발효 이후 최근까지 미국에서 185개 이상의 청정에너지·전기차 프로젝트가 발표됐고, 830억달러(109조원) 이상의 투자가 이뤄졌다.
미국에서는 배터리 기업과 완성차 회사 사이의 파트너십이 가동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보조금 지급 여부가 전기차 판매량에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자 북미 완성차 회사들은 글로벌 배터리 회사에 러브콜을 보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제네럴모터스(GM)와 ‘얼티엄셀즈’라는 합작 법인을 만들어 미국 테네시주 스프링힐스, 미시간주 랜싱 등에서 공장을 짓고 있다. SK온도 포드와 ‘블루오벌SK’라는 합작법인을 만들어 켄터키주와 테네시주에 배터리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삼성 SDI는 스탤란티스, GM과 각각 합작공장을 설립하기로 했다.
미국 정부는 IRA가 미국 내 전기차 생산을 크게 늘리는 기폭제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EV세일즈의 전망에 따르면, 2030년 미국의 전기차 판매대수는 994만대에 달하고, 전체 자동차 중 전기차 비중은 56.8%에 이르게 된다.
미국·캐나다와 함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통해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여 있는 멕시코도 리튬을 내세워 글로벌 배터리사에 손을 내밀고 있다. 멕시코 소노라주(州)에는 6000억달러(787조원) 규모의 리튬이 매장돼 있다. 지난해 4월 멕시코 의회는 리튬을 국유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국가 차원에서 리튬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작년 말 “소노라주에 설립된 배터리 공장에서만 우리의 리튬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리튬을 가져다 쓰고 싶으면 멕시코에 투자하라며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이미 멕시코는 지난 3월 테슬라의 다섯 번째 공장 유치에 성공했다. 멕시코 정부는 대규모 배터리 산업 단지를 조성할 계획인데, 테슬라가 이곳에 참여할지도 관심거리다.
중국 배터리 기업들은 한국행
요즘 동북아에서는 중국의 배터리 소재 기업들이 한국행을 선택하고 있다는 게 특징이다. 지금까지 발표된 투자 규모만 5조원을 넘어선다. 미국과 FTA를 체결한 한국에서 가공·생산된 배터리 부품은 미국 정부의 보조금 지급 대상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전구체 생산업체 거린메이는 SK온, 에코프로머티리얼즈와 함께 새만금 산업단지에 전구체 생산공장을 설립하기로 했다. 전구체는 배터리 4대 소재 중 하나인 양극재를 만들기 위한 기초 재료로 니켈, 코발트, 망간 등 원료들을 섞은 화합물이다. 세계 최대 코발트 생산기업인 중국 화유코발트는 포스코퓨처엠(옛 포스코케미칼)과는 경북 포항에, LG화학과는 새만금에 전구체 공장을 짓기로 했다. 세계 최대 전구체 기업인 중국의 CNGR도 포스코그룹과 전구체 공장을 짓기로 했고, 양극재 기업 중국 룽바이도 공장 증설을 계획하고 있다.
중국 배터리 기업들이 잇따라 한국 투자를 결정하면서 국내 배터리 소재 기업들이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4대 배터리 광물 정·제련 시장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중국으로부터 소재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망간 제련 산업에서 중국의 점유율은 90%에 달하고, 코발트(67.1%), 리튬(52.7%), 니켈(32.8%) 등도 중국이 점유율 1위를 휩쓸고 있다.
중국 배터리 기업들이 활발하게 해외로 진출하는 건 IRA와 연관이 있다. IRA는 ‘해외 우려 집단’으로부터 조달된 배터리 핵심 광물이나 부품이 포함될 경우 보조금 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 업계에서는 미국이 어떤 식으로든 중국을 ‘해외 우려 집단’에 포함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보고 있다. 따라서 중국 기업들은 해외 투자로 IRA를 우회하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중국의 세계 1위 배터리 제조사 CATL은 포드가 미국 미시건주에 짓는 배터리 공장에 기술을 지원하는 형태로 미국 진출을 꾀하고 있고, 비슷한 전략으로 테슬라와도 미국 공장 건설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컬럼비아대 글로벌에너지정책센터의 톰 모렌하우트 연구원은 “글로벌 배터리 업계는 충분한 공급량 확보, 생산 비용 인상 최소화, 중국에 대한 의존도 줄이기 등 수많은 요구에 직면하면서 변곡점에 서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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