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극비 방문한 이후락…"내가 안올줄 알았지요?"
1971~1979년 극비리 접촉
7·4공동성명 막전막후 담겨
김일성 "靑 습격 나무랐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안 오리라고 생각했지요?"(이후락)
"오리라 생각했습니다."(김영주)
1972년 5월 2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극비리에 평양을 찾아 김영주 북한노동당 조직지도부장과 대면한 '역사적 순간'을 기록한 회담 사료가 6일 공개됐다. 이날 통일부는 1971년부터 1979년 2월까지 진행된 정치 분야 남북회담 문서 1678쪽 분량을 일반에 공개했다. 공개된 사료에는 1970년대 초 동서 진영 간 긴장 완화(데탕트) 속에서 남과 북이 활로를 모색하면서도 치열한 수싸움을 펼치며 꿨던 '동상이몽'이 생생하게 드러났다.
사료를 살펴보면 이 부장은 방북 당시 평양 주암초대소에서 김일성 북한 주석 동생인 김 부장과 만나 "인위적 장벽을 제거하는 시발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해 친한 친구도 말렸지만 방북길에 올랐다"고 운을 뗐다. 이에 김 부장은 "시작이 반이라고, 우리가 마주 앉으니 (남북대화가) 절반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고 화답했다.
북측 김 부장은 에두르지 않고 남북정상회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이 부장과 내가 정치협상을 하고 있는 만치 이 급에서 내려가지 말고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만 단번에 해결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의 정치협상은 우리 당 총비(당총비서) 동지(김일성 주석)와 박정희 대통령 간에 정치협상을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 북측이 대화 공세를 펼치면서 흔히 사용했던 '톱다운(하향식)' 협상술에 나선 것이다.
그러자 남측 이 부장은 실무선에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나가는 '보텀업(상향식)' 전술로 응수했다. 그는 "처음부터 김 수상(김일성 주석)과 박 대통령이 회담을 하면 잘못될 경우 실망이 크게 된다"면서 "통일이 궁극적으로 이뤄질 때 김 수상과 박 대통령의 회담이 있어야 한다"고 맞받았다.
이 부장은 방북 때 김 주석도 면담했다. 그러나 이 부장과 김 주석이 나눈 대화는 이번에 공개된 사료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다만 김 주석이 방북한 이 부장을 만나 1968년 청와대 습격 미수사건(1·21사태)에 대해 사과성 언급을 했던 사실이 후속 남북회담 사료를 통해 간접 확인됐다.
이 부장은 그해 11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에서 "지난번 (김일성) 수상께서도 좌경 맹동분자들의 책동(1·21사태)을 나무란 일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남북은 이 부장 방북 이후 박성철 북측 제2부수상의 서울 방문을 통해 대화를 이어갔다. 결국 남북은 그해 7월 4일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통일 3대 원칙에 합의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남북은 성명을 발표하면서 서울과 평양을 잇는 직통 전화(핫라인) 설치도 공식화했다. 이 대화 채널은 기존 남북 간 연락 채널이 단절됐을 때도 기능을 유지하며 남측 국가정보원과 북측 노동당 통일전선부 간 비상 연락망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측은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이후 진행된 남북회담에서는 수차례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며 교착 국면을 만들었다.
[김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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