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년 만에 드러난 박정희·김일성 ‘적대적 공생’의 풍경

이제훈 2023. 7. 6.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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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첫 남북 당국회담 합의문서인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협상·채택 등과 관련한 남북회담 사료가 6일 일반에 공개됐다.

통일부는 이날 "1971년 11월부터 79년 2월까지의 정치 분야 남북회담문서 2권(1678쪽)을 국민에게 공개한다"고 밝혔다.

7·4공동성명 관련 남북 대화는 당사자들의 회고록과 미국 정부의 외교문서 공개로 상당 부분이 이미 알려졌지만 정부 공식 회담사료가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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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공동성명 회담사료 일반 공개
1972년 5월 군사분계선을 넘어 비밀 방북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왼쪽)이 김일성 내각 수상과 악수를 하고 있다. 통일부 제공

전후 첫 남북 당국회담 합의문서인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협상·채택 등과 관련한 남북회담 사료가 6일 일반에 공개됐다.

통일부는 이날 “1971년 11월부터 79년 2월까지의 정치 분야 남북회담문서 2권(1678쪽)을 국민에게 공개한다”고 밝혔다. 7·4공동성명 관련 남북 대화는 당사자들의 회고록과 미국 정부의 외교문서 공개로 상당 부분이 이미 알려졌지만 정부 공식 회담사료가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7·4공동성명 협의 앞뒤로 이뤄진 박정희 대통령과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 김일성 북한 수상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사이의 만남 관련 대화록은 이번에도 공개되지 않았다. 이날 공개된 회담문서 목록과 열람 절차는 남북회담본부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남북회담의 원형

회담사료에는 남북정상의 지침에 따른 비공개 실무·고위급 접촉→비공개 상호 방문→공식 회담 순서로 진행되는 남북 당국회담의 ‘원형’이 담겨 있다. 남북 고위급 대화의 물꼬는 1971년 11월 남북적십자 예비회담 대표로 참여한 정홍진 중앙정보부 협의조정국장과 김덕현 노동당 중앙위 조직담당 책임지도원이 텄다. 김덕현은 비밀접촉에서 “가장 높은 데서 신임하는 사람들이 비밀접촉”(71년 11월20일)을 “노동당과 민주공화당의 당고위급으로 하면 좋겠다”(71년 12월10일)고 제안했다. 이에 정홍진은 “우리측(고위급)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귀측은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1972년 3월7일 5차 접촉)이라고 화답했다. 

둘째, ‘비정치’ 의제와 ‘정치군사’ 의제의 병행 협의 방식이다. 애초 남쪽은 “(이산가족 만남 등) 교류협력부터”, 북은 “정치군사부터”로 맞섰다. 남북은 결국 ‘비정치 회의체’인 적십자회담과 정치군사를 포함한 고위급 종합 회의체인 ‘남북조절위원회’의 동시·병행 가동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는 1990년대 고위급회담과 2000년대 장관급회담 때 원용된 방식이다.

1972년 12월1일 박정희 대통령이 남북조절위원회 제1차 본회담에 참석하려고 서울에 온 박성철 북쪽 내각 제2부수상(왼쪽)과 악수하고 있다. 통일부 제공

박정희-김일성 회담 재촉하는 북, 피하는 남

김영주는 1972년 5월3일 이후락과 평양 회담에서 “(김일성) 총비동지와 박(정희) 대통령의 협상을 빨리하자”며 “지붕을 씌워놓고 내부미장을 하자”고 제안했으나, 이후락은 “여건 마련이 더욱 중요하다”며 “기초를 닦아놓고 집짓자”고 맞섰다. 남북 정상회담은 이뤄지지 않았다. 남북은 김일성-이후락 평양 만남(72년 5월3·4일, 11월3일), 박정희-박성철 서울 만남(72년 5월31일, 12월1일)을 통한 ‘간접 정상 대화’에서 멈췄다.

대화하되 인정하지 않는다

회담사료를 보면 7·4공동성명 합의 주체가 공식 국호와 직책 표기 없이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이후락·김영주”로 결정된 사정이 드러난다. 애초 북은 “박정희 대통령의 위임에 의하여” “김일성 수상의 위임에 의하여”라고 적힌 합의 초안을 제시했는데, 남이 “오히려 문제를 어렵게 만들 위험이 있다”며 “상사의 뜻을 받들어”라는 표현을 수정 제안해 “상부의 뜻을 받들어”로 최종 확정됐다. “고위층과 협의 과정에서 강경한 반대에 부닥쳐 (이후락)부장님이 매우 어려운 입장”이라는 정홍진의 전언(72년 6월25일)은 권력 내부의 갈등을 시사한다.

통일 준비 앞세운 분단독재 영구화

7·4공동성명 직후 박정희는 ‘유신헌법’이라는 이름으로, 김일성은 ‘주석제 개헌’으로 ‘분단독재 영구화’로 치달았다. 회담사료는 “적대적 공생”의 한자락을 드러낸다. 정홍진은 1972년 10월17일 “대통령 중대선언”이 있다고 발표 전날 북의 김덕현한테 알리고 발표 직후엔 ‘대통령 특별선언’ 전문을 건넸다. 김덕현은 노동당 중앙위 5기5차 전원회의(72년 10월23~26일)에서 “(주석제) 개헌 등을 토의했다”고 정홍진한테 알렸다(72년 10월31일).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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