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조선 파업 1년···약속은 녹슬었고, 삶은 더 기울었다
전국 흔든 거제 대우조선해양 하청파업 ‘1년’
하청·비정규직 현실 수면 위로 쏘아올렸지만
정부, 약속 외면…‘이중구조’는 ‘삼중구조’로
“사람 귀한 줄 아는 세상은 언제쯤 올까요?”
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설계도면에 맞게 절단된 대형 철판이 경남 거제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 옥포조선소 작업장으로 들어오면, 14년차 용접공 강봉재씨(52)가 용접기를 든다. 시퍼런 불꽃을 타다다닥 튀기며 배의 기본 뼈대가 될 부재들을 만든다. 강씨와 동료들이 만든 부재들은 다른 곳에서 조립과 조립을 거쳐 집 한 채만 한 블록이 된다.
거대한 블록들은 100m 높이 골리앗 크레인에 실려 바닷가 독(dock)으로 이동한다. 15년 경력 탑재취부공 이학수씨(45)의 차례다. 이씨가 가용접으로 고정한 블록을 용접공들이 다시 단단히 붙이면, 16년차 파워공 최연재씨(40)가 그라인더에 위이잉 시동을 건다. 도장 작업에 앞서 배 안팎의 녹과 용접부위를 매끈하게 갈아낸다. 작업자들이 밟는 발판은 10년 경력자 나윤옥씨(55)의 작품이다. 제조업에서 많은 공정이 자동화되는 추세지만 배만큼은 여전히 사람 손을 많이 거쳐야 한다.
도장이 마무리되면 배에 설비를 채운다. 시험운전을 거쳐 마침내 배는 옥포 앞바다에 육중한 몸을 띄운다. 방파제 사이로 난 폭 270m의 물길을 지나, 오대양을 향해 나아간다.
긴밀한 연결 공정으로 배를 완성한 숙련공 강씨와 이씨, 나씨, 최씨는 서로 다른 하청업체 노동자들이다. ‘세계 1위’ 조선업 생산 대부분을 담당하며 수출경제를 지탱해 온 이들이지만, 지난 7년간 삶은 내내 휘청였다. 30%의 임금 삭감, 심각한 저임금과 고용불안, 원청의 외면 속에 많은 이들이 조선소를 떠났다.
떠나지 못한 네 사람은 지난해 6월2일부터 7월22일까지 51일간 일손을 놓았다.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라는 구호와 함께 0.3평 철제 케이지 농성으로 하청·비정규직의 현실을 전국에 알린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파업’에 참여했다. 파업 뒤 정부는 이중구조 개선을 약속했다. 정부는 원청·하청업체 대표들과 ‘조선업 상생협약’을 맺고 “이중구조를 풀 계기가 마련됐다”고 했다. 조선소는 정부가 지금도 연일 강조하는 ‘이중구조 개선’의 첫 번째 시험대다.
파업 1년이 지난 지금, 조선소는 달라졌을까. 경향신문은 당시 파업에 참여한 현직 하청노동자 네명을 만났다. ‘돈을 벌게 해 주겠다’며 한국 정부가 대거 데려온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정부 약속이 지켜졌냐는 물음에 모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중구조는 ‘삼중구조’로 악화했고, 삶은 전보다 더 기울었다. 이주노동자들은 언어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채 저임금과 과로 속에 방치됐다.
1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모래알처럼 흩어진 사람들
거제에서는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고 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시작된 한국 조선업 호황은 2010~2011년 정점을 맞았다. 일손이 급해진 조선소는 사내하청 규모를 크게 늘리며 평균보다 높은 시급과 상여금 550%를 약속했다. 돈이 절실한 이들이 옥포 앞바다로 밀려들었다. 경기도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이씨도, 경남 하동 화력발전소 하청노동자 최씨도, 홀로 노후와 세 자녀 부양을 걱정하던 인천 나씨도, 업체 폐업으로 일자리를 잃은 제주 토박이 운송업자 강씨도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바다를 넘었다.
조선소 일은 몹시 힘들고 위험했다. 야근·특근도 많았다. 대신 고생한 만큼 보상은 따랐다. 초짜들은 어느새 숙련공(기량공)이 됐고, 많이 일하면 당시에도 1년에 4000만원을 넘게 벌 수 있었다. 조선소 앞 식당가와 먹자골목은 밤마다 붐볐다. 업체의 ‘분위기메이커’였던 이씨는 종종 동료들과 바닷가 펜션에서 삼겹살을 구웠다. 주말이면 진주나 부산으로 놀러 나가던 최씨는 아내를 만났다.
‘먹고 살 만한 시절’은 2015년쯤부터 녹슬기 시작했다.
글로벌 경기 둔화와 유가 급락으로 수주량이 가라앉았다. 2016년 4월 조선업 ‘빅3(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는 한 척의 배도 수주하지 못했다.
아래부터 물이 차올랐다. 하청노동자의 수입을 지탱하던 상여금이 사라졌다. 업체들은 깎인 상여금 일부를 기본급으로 돌리는 대신, 수주가 정상화되면 임금을 복구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대표가 어려운 시기를 같이 이겨내자고 하더라고요. 다들 그땐 같이 가자는 분위기라 넘어갔는데, 그 뒤로 (임금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 거죠.” 강씨의 기억이다.
긴 가뭄이었다. 물가는 계속 뛰는데 본공(하청업체 직접고용 노동자)의 임금은 밑바닥에 고정됐다. ‘고생한 만큼 보상이 따르던’ 조선소가, 일부 공정을 제외하면 20년 숙련공도 무경력자와 똑같이 최저임금을 받는 곳이 됐다. “연수입이 1000만원에서 2000만원씩 떨어지니까 생활이 안 됐어요. 서로 술 한잔하자고 말하기도 부담스러워지고….” 이씨가 말했다. 하청업체들은 줄줄이 쓰러졌고 어떤 사장들은 돈만 챙겨 달아났다. 나씨도 18개월치 국민연금 보험료가 밀렸던 데다 7년치 퇴직금도 받지 못할 뻔했다.
모래알처럼 숙련공들이 흩어졌다. 많은 이들은 고용이 불안한 대신 일당이 높은 ‘물량팀(1차 하청업체로부터 단기 재하도급을 받아 일하는 비정규직)’이나 아웃소싱 업체로 옮겨갔다. 조선소 생산직 중 5~10%를 오가던 물량팀은 이 당시 전체 하청인력의 30%까지 급증한 것으로 추정된다. 더 많은 이들은 아예 조선소를 떠나 경기 평택 등 공사현장으로 향했다. 2015년 18만7652명이던 조선업 종사자는 2021년 9만9858명으로 줄었다. 거제 양대 조선소(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사내하청 노동자는 같은 기간 5만9607명에서 2만303명까지 떨어졌다.
떠날 수 없는 이들만 남았다.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
2021년부터 조선업에 다시 호황이 찾아왔지만, 깎인 임금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하청노동자들은 폭발했다. 7년 동안 밑바닥 임금과 고강도 노동을 감수하며 조선소를 지킨 이들이었다. 하청업체는 ‘원청이 돈을 안 주면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했고, 원청인 대우조선해양은 ‘교섭 의무가 없다’며 교섭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모두의 외면 속에서 하청노조(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에 남은 유일한 선택지는 파업이었다.
2022년 6월2일 파업에 돌입한 하청노조가 조선소 곳곳에 천막을 차리자 비로소 원청이 나타났다. ‘구사대’가 난입해 소화기를 뿌렸다. 키가 150㎝ 남짓한 나씨는 용역 경비원의 팔에 떠밀려 12번 흉추가 골절됐다. “밀리고 밀리다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이씨와 조합원들은 파업 20일째인 6월22일 제1독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6명은 블록 중턱 10m 높이 난간에 올랐다. 유최안 부지회장은 독 바닥에 철제 케이지를 짓고 몸을 구겨 넣었다. 블록에 오른 이씨가 난간 너머를 내려다보면, 케이지 옆으로 삐져나온 유 부지회장의 팔다리가 보였다. 이씨는 자주 내려다보지 못했다.
배를 만들 때처럼 하청노동자들은 서로를 연결했다. 파워공 최씨는 탑차를 끌고 조선소를 돌며 농성자와 조합원들에게 음식을 전달했다. 발판공인 나씨가 입원 전 뚝딱 만든 천막을 용접공 강씨가 지켰다. 강씨는 파업이 장기화되자 서울로 향해 당시 대우조선해양의 대주주이던 산업은행 앞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유최안 동지 모습을 보고 내내 울었어요. 뜻을 세웠으면 끝까지 해봐야 한다고 행동으로 보여준 거잖아요. 그 모습이 단식에 자원한 계기였어요.”
51일간 계속된 파업도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의 삭감된 임금을 끝내 돌려놓지는 못했다. 그해 7월22일, 하청노조가 거의 모든 요구를 포기하고 서명한 합의서에도 원청은 끝내 도장을 찍지 않았다. 대신 47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걸었다.
“그래도 우리 열악한 환경을 알린 성과가 제일 컸죠.” 나씨 말대로 파업은 임금을 올리진 못했지만, 하청·비정규직이 처한 ‘이중구조’를 전국적 이슈로 쏘아 올렸다. 파업 내내 강경 대응을 시사하던 정부도 여론에 떠밀려 뒤늦게 대책을 마련했다. 정부는 원·하청업체 대표들과 전문가, 지방자치단체를 불러모아 ‘조선업 상생 협의체’를 꾸렸다. 당사자인 노동자의 자리는 없었다.
4개월의 논의를 거쳐 지난 2월27일 정부는 ‘조선업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을 위한 상생협약’을 발표했다. 원청이 하청업체의 생산성 향상 노력에 따라 기성금을 올려 주고, 재하도급(물량팀·아웃소싱)을 원청과 직접 계약하는 ‘프로젝트 협력사’로 전환한다는 내용이었다. 임금체불 예방, 작업환경 개선, 외국인력 신속 도입 등도 협약서에 담겼다.
정부는 “상생과 연대 방식의 이중구조 개선을 위한 첫 모델을 제시했다”며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협약 체결식에서 “노동시장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며 “약자를 두텁게 보호하고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는 첫 번째 퍼즐이 완성됐다”고 했다.
‘이중구조’가 ‘삼중구조’로
이중구조를 개선한다던 정부의 약속은 지켜졌을까.
“더 나빠졌죠. 이중구조가 아니라 삼중구조가 되고 있어요.” 이씨가 말했다. 원청과 하청의 격차가 줄기는커녕 물량팀·아웃소싱 등 불안정 고용만 더 늘었다는 이야기다.
기업의 자율에 맡겨진 본공들의 임금은 파업 이후에도 오르지 않았다. 올해 최저임금이 시급 9620원인데 15년차 취부공 이씨의 시급은 1만620원, 10년 경력 발판공 나씨의 시급은 9881원이다. 반면 물량팀·아웃소싱의 단가는 파업 이후에도 계속 올라 현재 시간당 약 2만7000~3만원 선이다.
“그쪽으로 가라고 계속 유도하는 거죠. 상용직 본공으로 버티면 생활이 안 되니까 버티다버티다 넘어가는 분들이 많아요.” 이씨가 말했다. “돈은 많이 벌겠지만 길어야 3개월짜리 계약을 하면서 고용을 내려놔야 해요. (업체 입장에선) 나중에 일감 없어지면 자르면 그만이거든요.”
물량팀·아웃소싱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자리에 정부는 이주노동자를 쏟아부었다. 조선업 E-7(전문인력)과 E-9(비전문인력) 비자 쿼터를 대폭 확대했다. 몰려든 이들은 제대로 된 언어·적응교육도 받지 못하고 현장에 급히 투입됐다. 부족한 정착지원 탓에 현장의 고충만 커졌다고 하청노동자들은 말했다. “말이 안 통하니 일은 일대로 안 되고, 위험요인을 제대로 교육해야 하는데 지금은 반장이고 관리자고 다 나가고 없으니….” 나씨의 걱정이다.
애초에 상생협약의 내용부터가 문제였을지도 모른다고, 강씨는 생각한다. “하청업체 성과에 따라 기성금 준다는 건 ‘너네가 열라 용써서 가져가라’ 이거잖아요. 그게 무슨 협약입니까?” 강씨가 목소리를 높였다. “프로젝트 협력사는 일 많을 때 물량팀 아웃소싱하는 거 이름 바꾼 거밖에 더 돼요?” 노동자 참여가 빠진 채, 모든 게 원청의 의지에 달린 상생협약은 강씨에게 “신빙성 없는 탁상공론”이다.
사람 귀한 줄 알아야지
배는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
배만큼은 여전히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한다. 조선소에서 10년을 보낸 나씨가 내린 결론이다. “조선소는 자동화될 수 있는 건 다 돼서, 이젠 사람밖에 못 하는 일만 남았어요.” 나씨는 한발 더 나아간다. “그러니까 더 사람 귀한 줄 알아야죠. 지금 조선소는 노동자를 쓰다 버리는 소모품으로 보는데, 노동3권을 보장하고 노동의 가치를 알아주는 곳이 돼야 해요.”
배는 숙련된 노동자가 만들어야 한다. ‘육상’으로 떠난 숙련공 지인들에게 아직도 종종 ‘빨리 올라오라’는 연락을 받는 최씨의 결론이다. “힘들고 위험한데 월급은 편의점 알바만큼 주니까 안 오죠. 인력난이라는데, 그동안 깎인 임금과 상여금을 다시 대폭 올려야 떠난 숙련공들이 돌아올 겁니다.”
어떻게 노동의 가치를 높이고, 숙련공에게 정당한 보상을 보장할 수 있을까. “현장 하청노동자들은 답을 다 알 걸요?” 이씨가 말했다. “하청업체는 사람 한 명도 마음대로 못 뽑아요. 설비도 없고, 공정도 원청이 짭니다. 우리가 원청과 대화를 할 수 있어야죠.” 강씨의 생각도 같다. “노동조합법 개정안(노란봉투법)을 현실에 맞게 만들어야죠. 과거보다 노동이 복잡해진 게 현실이니까요. 정치가 앞날을 미리 대비하지는 못해도 현실에 발맞추는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전국을 뒤흔든 파업 후 1년. 떠나지 못한 이들만 남은 조선소에서, 떠나보내지 못할 기억을 안고 출근하는 이들이 있다.
파업이 마무리되고 3개월이 지난 어느 가을밤, 이씨와 최씨는 회사 동료와 함께 한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길을 가던 원청 직원이 하청노조 조끼를 보고 다가왔다. 당황하는 최씨와 미심쩍어하는 이씨에게 그는 말했다.
“하청노조 분들이시죠? 고생 많으십니다. 다 잘 될 겁니다. 지금은 소수지만, 나중에 커질 거니까. 힘내십쇼.” 편의점에 들어간 원청 직원은 맥주를 한 아름 사 들고 나와 건넸다.
‘다 잘 될 거’라던 그의 응원에 여전히 물음표를 붙인 채, 이씨는 오늘도 조선소로 출근한다. “쉽게 바뀌진 않겠지만…. 나는 빛을 못 보더라도 후배들이나 내 아들 또래에게까지 이런 노동환경을 물려주는 건 선배로서, 아빠로서 정말 못 할 짓입니다. 지금처럼 가면 대한민국은 일할 사람이 없어요.”
“맡은 일은 꼭 처리하는 성격”으로 업체에서 인정받은 15년차 취부공은 “언젠가 조선소를 떠나더라도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떠나고 싶다”고 했다. 이씨는 요즘 다리를 다친 한 이주노동자의 산재 처리를 돕고 있다.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김지환 기자 baldkim@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한동훈, 이르면 12일 ‘탄핵 찬성’으로 선회 결정 밝힐 듯
- 나경원·권성동·안철수 등 “탄핵안 상정, 토요일 안돼…신변 위협” 국회의장 항의방문
- [단독]윤석열, 계엄 발표 3시간 전 조지호 안가로 불렀다
- 윤상현 “윤석열 계엄 선포, 고도의 정치행위”···야당 “전두환, 내란공범” 고성
- “선배님, 역사의 죄인 될겁니까” 신동욱·조은희·박정훈·박정하 등에 후배들 대자보 행렬
- [단독]윤 대통령, ‘계엄 회의 거부’ 류혁 법무부 감찰관 사표 수리
- 윤상현 ‘계엄=통치행위’ 발언에···민주 “원조 내란범 사위답다”
- 윤석열 내란죄 ‘키맨’···민주당 “곽종근 지켜라” 법적 보호조치 착수
- 계엄 이후 “민주주의를 지켜가는 어린이들에게…”어느 교장의 편지
- 추미애 “윤석열, 하야할 사람 아냐···당장 긴급체포 해도 이상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