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외교부... 강제동원 배상금 법원에 떠넘기려다 망신살 [문지방]
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강한 유감을 표합니다. 공탁제도는 공탁공무원의 형식적 심사권, 공탁 사무의 기계적 처리, 형식적 처리를 전제로 운영된다는 것이 확립된 대법원 판례(96다11747)가 있습니다.”
외교부 4일 입장문
외교부가 4일 광주지법을 상대로 내놓은 항변입니다. 등장하는 단어가 어렵지요. '공탁(供託)'이라는 표현이 핵심인데요. 돈이나 유가증권을 맡기는 행위입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행정안전부 산하)은 법원에 돈을 맡기려 했습니다. 왜일까요.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금이라고 들어보셨을 겁니다. 대법원이 2018년 미쓰비시중공업을 비롯한 일본 전범기업에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으로 피해를 입은 원고들에게 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는데요.
아시다시피 올해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을 오가면서 일본 원고기업은 쏙 빠지고 우리 기업과 재단이 피해자들에게 대신 배상금을 내는 '제3자' 변제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적잖은 논란이 있지만, 어쨌든 좋습니다. 그러면 정부가 피해자들에게 돈을 줘야 하겠지요. 그런데 소송 당사자 15명 가운데 4명이 거부합니다. 윤 대통령과 정부는 "끝까지 설득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졌나 봅니다. 재단이 대뜸 법원에 판결금을 맡기겠다고 한 것이지요. 한마디로, 피해 당사자에게 직접 돈을 지급하지는 못했지만 공탁을 통해 법적인 절차를 모두 끝냈다는 겁니다. 까다롭고 복잡한 이 사안에서 속히 벗어나고 싶은 정부의 속내가 엿보입니다.
법원 담당직원의 거부... 파장 일파만파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광주지법이 외교부의 공탁에 대해 '불수리' 결정을 내린 겁니다. 행정절차를 담당하는 법원 공무원이 거부한 것이죠.
그러자 외교부는 위와 같은 입장문을 내놓았습니다. '형식적', '기계적'이라는 표현에서 묻어나듯 광주지법이 별다른 판단 권한이 없는데 과잉해석했다는 주장입니다. 공탁공무원이 일단 제3자 변제를 위한 돈을 맡아놓고 재판 절차를 통해 적법성 여부를 따져야 하는 건데, 공무원이 멋대로 돈을 받지 않겠다 판단했다는 겁니다. 외교부는 헌법까지 운운하며 “유례없는 일”이라고 규탄했습니다. 마치 공탁공무원이 대역죄인인 양 몰아세운 셈입니다.
과연 외교부의 주장은 사실일까요. 법적으로 완전히 틀렸습니다. 시험을 봤다면 영락없는 낙제점입니다. 법을 멋대로 해석하면서 오만한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왜 그런지 사건의 전말을 살펴봅시다.
“공탁공무원은 형식적 심사권만”이라며 엉뚱한 판례 꺼낸 외교부
정부가 제3자 배상을 골자로 한 강제동원 해법을 발표한 게 1월입니다. 하지만 돈을 받아야 할 15명 가운데 4명은 끝까지 거부했죠. 외교부는 이 중 먼저 양금덕 할머니에 대한 판결금 지급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주소지인 광주지법에 공탁절차를 밟습니다.
그럼 담당 공무원은 왜 재단의 접수를 거부했을까요. 사유는 “제3자 변제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양 할머니의 의견서에 근거했습니다. 일본기업이 아닌 다른 주체가 대신 내는 돈을 맡아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에 재단이 아닌 외교부가 “공탁공무원이 불수리 결정을 한 건 권한을 넘어선 것”이라고 반발했습니다. 그 근거로 공탁공무원은 형식적 심사권을 갖고 있다고 한 1997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제시합니다.
아니, 근데 이 판결문. 공탁공무원 불수리 결정 이의신청 또는 항고 판결문도 아니고, ‘나도 보상금을 받아야 한다’며 일반인들이 제기한 소송 건입니다. 제3자 변제와 관련한 논리는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공탁공무원의 심사권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핵심 판결사안도 아니고 보론(補論)입니다. 핵심 법리 쟁점과 별개로 보충적으로 판단을 한 사안을 보론이라고 하는데요. 보론을 따지더라도 “내가 돈을 받을 사람이라고 주장한 이에 대해 수령권자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건 공탁공무원이 할 사안이 아니다”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공탁공무원이 제3자 변제안에 따른 공탁을 불수리해야 하는지 여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가령, 토지개발공사가 토지보상금을 지급하려는데 토지와 그 위에 세워진 건물의 소유자가 각기 다릅니다. 이때 누구한테 보상금을 줘야 할까요. 공사는 ‘에라 모르겠다. 일단 법원에 돈을 맡기자’ 하고 법원에 돈을 맡깁니다.
건물 지분을 갖고 있는 A씨는 “저한테 돈을 주세요” 하고 법원에 공탁금출급청구서를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공탁공무원은 제출된 서류만으로는 A씨가 토지보상금을 지급받아야 하는 사람인지 명확하지 않다며 돈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자 A씨는 “내가 지분을 갖고 있다는 걸 법원이 확인해주세요” 하고 소송을 제기합니다. 1심은 지분 여부를 공탁 절차 과정에서 따지면 될 일이지, 별도 소송을 통해 따지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지만, 2심 판결은 달랐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은 2심의 손을 들어줍니다. 요약하면, “누가 보상금을 받아야 하는지 명확하지가 않을 때 돈을 받아가겠다고 신청한 사람이 있다면, 법원 판결을 통해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3자 변제’ 공탁 결정권한, 공탁공무원에게 없다?…사무규칙에 명시
그럼 외교부의 주장대로 공탁공무원이 돈을 맡기겠다는 신청을 불수리할 권한이 없는지, 특히 제3자 변제안과 관련해 판단할 권한이 없는지 살펴보죠. 2022년 개정된 공탁규칙 제48조는 공탁관이 공탁 신청이나 공탁물 출급 및 회수 청구를 불수리할 경우 그 사유를 기재해 결정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민법 제481조에 따라 채권자가 제3자 변제를 거부했기 때문에 공탁을 거부한다는 처분은 적법합니다.
더구나 공무원의 불수리 결정이 타당한지를 따진 판례들이 존재합니다. 2009년 나온 대법원 판례가 있습니다. 이 사건은 공탁공무원이 채권자가 3자 변제를 거부한 점, 그리고 이해관계에 있지 않은 점을 근거로 돈을 맡지 않겠다고 불수리한 사건입니다. 불수리 결정문에는 민법 제481조와 제469조 2항이 언급돼 있습니다.
대법원은 공탁공무원이 판단을 적법하게 했고, 타당하게 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공탁 접수 절차에 따라 제출된 문서로 봤을 때, 법적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가 돈을 수령해가야 하는 사람의 의사에 반해 돈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죠. 공탁공무원이 권한을 넘어 판단했다는 외교부의 주장은 거짓이 됩니다.
외교부는 이 판례에 대해 민법 469조 2항에 관한 건이지, 469조 1항에 관한 건이 아니라고 하는데요. 그럼 아예 쟁점 자체가 다른 1997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왜 근거랍시고 제시한 걸까요. 자기모순입니다.
외교부가 하고 싶은 말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법적 이해관계가 있는 제3자’인지 법원의 판단을 구해야 한다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석을 해도 그건 재단이 판단을 구하는 소송을 따로 진행해야 할 사안이지, 왜 공탁금 수락을 해주지 않냐고 삿대질할 일이 아닙니다. 외교부는 유수의 로펌들과 계약을 맺고 법률자문을 받는데, 정작 자신들이 전원합의체 판결을 잘못 해석해놓고 공탁공무원을 탓하는 적반하장을 보이고 있는 겁니다.
전주지법도 5일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에 대한 공탁문제를 놓고 불수리 결정을 내립니다. 수원지법도 유족 2명에 대해 불수리 결정합니다. 외교부가 법원에 연이틀 호되게 당한 것입니다. 콧대 높기로 소문난 외교부가 이처럼 망신살이 뻗친 건 사상 초유의 일입니다.
다시 궁금해집니다. 대체 외교부는 왜 아무 실익이 없는 이런 절차를 무리해서 밀어붙인 것일까요.
문제 해결에 '급급한' 외교부…피해자 우선 원칙 돌아봐야
제3자 변제라는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은 완벽하진 않지만, 국내법이 적용되지 않는 외교환경과 대법원 판결을 합법적으로 우회해야 하는 현실적 한계를 모두 고려해 마련한 ‘자구책’이었습니다. 일본은 한일청구권협정 위반이라며 한국을 겨냥한 수출통제를 감행했었죠. 한국의 핵심 외교대상국인 미국은 외교사안을 법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에 반대의견을 내비치고 있었고요. 우리의 최고 맹방인 미일 양국이 모두 쌍심지를 켠 것입니다.
다행히 정부 해법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데엔 어느 정도 공감대가 있습니다. 원고 15명 중 생존피해자 1명을 비롯한 11명의 원고들이 ‘제3자 변제안’을 수용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거부의사를 표한 원고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공탁절차를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건 국가의 '폭력'이나 다름없어 보입니다.
앞서 한 강제동원 생존피해자가 제3자 변제안을 수락하겠다고 하자 시민단체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피해자와 그 가족을 말리고 나섰죠. 원고들의 판결금 수령을 저지하기 위한 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일각에서는 “피해자들을 위한 단체라면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피해자들에게 강요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이에 외교부는 “피해자의 의사를 우선하겠다”며 “남은 피해자들도 진정성 있게 설득해나가겠다”고 점잖게 약속했죠. 그런데 돌연 뒤통수를 치며 공탁절차를 밟았고, 적법절차에 따른 법원 공무원의 결정으로 제동이 걸린 셈입니다.
그 말을 이제 고스란히 외교부에 돌려주고 싶습니다. ‘피해자 우선주의’ 원칙을 제3자 변제안을 거부한 피해자들에게도 적용하는 건 당연하지 않나요. 평생 마음속 응어리를 부여잡고 하루하루 간신히 버티며 우리 정부만 바라본 피해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정부가 앞에서는 다독이면서, 뒤에서는 공탁을 통해 비수를 꽂으려 했습니다. 외교부의 진정성이 무엇인지 다시 보여주길 기대합니다.
문재연 기자 munj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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