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용 확 낮춘 뇌 질환 진단기기 만든 한인 과학자 “외할머니 뇌졸중에 독학으로 뇌 과학 뛰어들었죠”
뇌 질환 진단업체 ‘엘비스’ 창업 10주년… 진단기기 ‘뉴로매치’ 연내 상용화
“누구나, 어디서나 뇌 진단한다… 리더십 있는 기술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아”
“디지털시대 과학계 네트워크 중요… 과학기술의 힘 이해해야”
모든 뇌 질환이 없어지진 않겠죠. 하지만 뇌에 이상이 나타나면 누구나, 어디서나,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드는 게 꿈입니다.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첫 단계는 원인을 파악하는 일이다. 하지만 뇌는 인체의 다른 부위와 달리 질환의 원인은커녕 어떻게 동작하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인류가 뇌전증과 뇌졸중, 파킨슨, 치매와 같은 뇌 질환에 눈 뜨고 당할 수밖에 없는 건 뇌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시작된다.
제1회 세계 한인과학기술인대회가 열린 지난 5일 서울 강남구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만난 이진형(46) 미국 스탠퍼드대 의대 및 전자공학과 교수는 “뇌 기능을 정상화하려면 뇌의 기능을 측정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가 수백억 개에 달하는 신경세포로 이뤄진 뇌의 기능을 파악하기 위해 ‘뇌 회로도’를 연구하는 이유다.
뇌 회로도는 광유전학과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을 이용해 밝혀낸 개념이다. 광유전학은 빛을 통해 이온 채널을 세포에 발현시켜 활성을 확인하는 생물학적 기법으로, 여기에 혈액의 흐름으로 두뇌 활동을 파악할 수 있는 fMRI를 융합했다. 이 방식으로 뇌 기능을 세세하게 복제해 일종의 ‘두뇌 디지털 트윈’을 만들 수 있다.
이 교수는 스탠퍼드대에서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의과대학과 공대 전자공학과 종신교수에 임용된 석학이다. 서울과학고와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거쳐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전자공학으로 석사와 박사를 지냈다. 전기공학도였던 이 교수는 외할머니의 뇌졸중을 지켜보면서 뇌 과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전기공학과 뇌 과학을 결합한 독창적인 연구를 시작했고, 2010년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새로운 혁신가상’ 2012년 미국 간질병재단의 ‘간질치료프로젝트상’, 2013년 미국 알츠하이머협회의 ‘신(新)연구자상’ 등을 수상하며 전 세계 의료계의 주목을 받았다. 지금은 스탠퍼드대에서 의과대학 신경과 및 공대 바이오공학과에서 동시에 종신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전기공학도로 시작해 뇌 과학자가 된 이 교수는 뇌 회로도를 기반으로, 과학계를 놀라게 할 준비를 하고 있다. 2013년 창업한 엘비스(LVIS)에서 개발해온 인공지능(AI) 기반 뇌 질환 진단·치료 플랫폼 ‘뉴로매치(NeuroMatch)’를 연내 상용화할 예정이다. 이 교수는 최근 한국에 들어온 이후 뉴로매치를 선보이기 위해 국내 바이오 업체인 옵트바이오와 휴온스메디텍 등과 사업 논의를 하느라 바쁘게 지냈다. 창업 이후 10년 동안 고생한 결실이 코앞에 다가온 셈이다.
뉴로매치의 상용화는 이 교수에게 의미가 남다르다. 이 교수는 외할머니가 12년간 뇌졸중과 투병하는 모습을 보고 뇌 과학 공부를 시작했다. 이번 연구 성과는 외할머니에게 바치는 헌사와도 같다. 이 교수는 “이전엔 뇌 질환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외할머니가 반신불수가 돼 12년간 병상에 계셨다”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정말 답답한 상황이었다. ‘왜 뇌는 고칠 수 없을까’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뇌 질환은 이미 심각한 사회 문제다. 중앙치매센터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20년 기준 국내 치매 환자는 83만명에 달했고, 뇌졸중 환자도 해마다 늘어 60만명을 넘어섰다. 반면 한국의 신경외과 의사 수는 10만명당 4.75명이다. 한 눈에 봐도 적어 보이지만 한국의 신경외과 의사 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두 번째로 많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도 뇌질환과 싸울 의사가 부족한 셈이다. 의사가 부족하다 보니 진단과 치료에 시간적, 금전적 비용이 많이 투입된다.
이 교수는 뉴로매치 상용화로 뇌 질환 진단·치료 비용이 현저히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 교수는 “미국 같은 선진국도 신경외과 의사가 2만4000명 중 1명에 불과하고, 대부분 환자는 의사를 만나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며 “(뉴로매치는) 뇌 질환에 대한 정보를 시스템화하기 때문에 의료 비용을 줄이고, 어디서든 환자를 볼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뇌전증 진단·치료를 첫 번째 솔루션으로 선보인 이후 파킨슨과 치매, 자폐증, 수면장애로 영역을 넓힐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뇌 질환을 정복하는 과정은 물론 쉽지 않았다. 뇌 회로도 연구에 뛰어든 2007년만 해도 주변에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고, 연구에 필요한 정보도 없었다. 이 교수는 “연구를 돌 쌓기에 비유하면 내 연구는 만들어진 돌탑 위에 돌 놓는 것이 아닌 주춧돌부터 다져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굉장히 힘들었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며 “하지만 선구자가 될 만한 기술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뉴로매치 상용화를 앞두고 있지만, 이 교수는 이제 겨우 한발 뗐을 뿐이라고 자평했다. 그는 “이제 겨우 주춧돌을 깔고 이런 집을 지어야겠다는 걸 알 수 있는 단계에 왔다”면서 “뉴로매치가 주는 기회는 많다. 어떤 교수는 뉴로매치 내용을 듣더니 ‘이걸 사용하는 모든 연구가 논문이 될 수 있겠다’고 평가해주기도 했다”고 말하며 웃었다.
이 교수는 한국 과학 발전을 위한 조언도 남겼다. 가장 중요한 건 해외와 국내를 잇는 다리다. 과학기술이 빠르게 변하는 디지털 시대에는 과학기술인 사이의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가 활발히 공유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번 세계한인과학기술인대회를 앞으로도 한인 과학자들의 만남의 장으로 정착시켜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교수는 “다른 국가에 비해 전 세계로 뻗어간 한인 과학자들에 대한 지원이 의외로 없다”며 “언어와 문화가 같은 한인 과학자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도록 지원해 리더십 있는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젊은 세대들에게 과학기술의 힘을 이해시킨다면 과학자의 길을 자연스럽게 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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