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용 확 낮춘 뇌 질환 진단기기 만든 한인 과학자 “외할머니 뇌졸중에 독학으로 뇌 과학 뛰어들었죠”

송복규 기자 2023. 7. 6.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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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형 미국 스탠퍼드대 의대·전자공학과 교수 인터뷰
뇌 질환 진단업체 ‘엘비스’ 창업 10주년… 진단기기 ‘뉴로매치’ 연내 상용화
“누구나, 어디서나 뇌 진단한다… 리더십 있는 기술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아”
“디지털시대 과학계 네트워크 중요… 과학기술의 힘 이해해야”
이진형 미국 스탠퍼드대 의과대학 및 전자공학과 종신교수가 이달 5일 서울 강남구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조선비즈와 인터뷰하고 있다./송복규 기자
모든 뇌 질환이 없어지진 않겠죠. 하지만 뇌에 이상이 나타나면 누구나, 어디서나,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드는 게 꿈입니다.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첫 단계는 원인을 파악하는 일이다. 하지만 뇌는 인체의 다른 부위와 달리 질환의 원인은커녕 어떻게 동작하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인류가 뇌전증과 뇌졸중, 파킨슨, 치매와 같은 뇌 질환에 눈 뜨고 당할 수밖에 없는 건 뇌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시작된다.

제1회 세계 한인과학기술인대회가 열린 지난 5일 서울 강남구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만난 이진형(46) 미국 스탠퍼드대 의대 및 전자공학과 교수는 “뇌 기능을 정상화하려면 뇌의 기능을 측정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가 수백억 개에 달하는 신경세포로 이뤄진 뇌의 기능을 파악하기 위해 ‘뇌 회로도’를 연구하는 이유다.

뇌 회로도는 광유전학과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을 이용해 밝혀낸 개념이다. 광유전학은 빛을 통해 이온 채널을 세포에 발현시켜 활성을 확인하는 생물학적 기법으로, 여기에 혈액의 흐름으로 두뇌 활동을 파악할 수 있는 fMRI를 융합했다. 이 방식으로 뇌 기능을 세세하게 복제해 일종의 ‘두뇌 디지털 트윈’을 만들 수 있다.

이 교수는 스탠퍼드대에서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의과대학과 공대 전자공학과 종신교수에 임용된 석학이다. 서울과학고와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거쳐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전자공학으로 석사와 박사를 지냈다. 전기공학도였던 이 교수는 외할머니의 뇌졸중을 지켜보면서 뇌 과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전기공학과 뇌 과학을 결합한 독창적인 연구를 시작했고, 2010년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새로운 혁신가상’ 2012년 미국 간질병재단의 ‘간질치료프로젝트상’, 2013년 미국 알츠하이머협회의 ‘신(新)연구자상’ 등을 수상하며 전 세계 의료계의 주목을 받았다. 지금은 스탠퍼드대에서 의과대학 신경과 및 공대 바이오공학과에서 동시에 종신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이진형 미국 스탠퍼드대 의과대학 및 전자공학과 교수가 2013년 창업한 엘비스(LVIS) 관련 그림. 엘비스는 'Live'와 'Visualization'에서 영감을 받아 지은 이름이다./LVIS

전기공학도로 시작해 뇌 과학자가 된 이 교수는 뇌 회로도를 기반으로, 과학계를 놀라게 할 준비를 하고 있다. 2013년 창업한 엘비스(LVIS)에서 개발해온 인공지능(AI) 기반 뇌 질환 진단·치료 플랫폼 ‘뉴로매치(NeuroMatch)’를 연내 상용화할 예정이다. 이 교수는 최근 한국에 들어온 이후 뉴로매치를 선보이기 위해 국내 바이오 업체인 옵트바이오와 휴온스메디텍 등과 사업 논의를 하느라 바쁘게 지냈다. 창업 이후 10년 동안 고생한 결실이 코앞에 다가온 셈이다.

뉴로매치의 상용화는 이 교수에게 의미가 남다르다. 이 교수는 외할머니가 12년간 뇌졸중과 투병하는 모습을 보고 뇌 과학 공부를 시작했다. 이번 연구 성과는 외할머니에게 바치는 헌사와도 같다. 이 교수는 “이전엔 뇌 질환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외할머니가 반신불수가 돼 12년간 병상에 계셨다”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정말 답답한 상황이었다. ‘왜 뇌는 고칠 수 없을까’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뇌 질환은 이미 심각한 사회 문제다. 중앙치매센터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20년 기준 국내 치매 환자는 83만명에 달했고, 뇌졸중 환자도 해마다 늘어 60만명을 넘어섰다. 반면 한국의 신경외과 의사 수는 10만명당 4.75명이다. 한 눈에 봐도 적어 보이지만 한국의 신경외과 의사 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두 번째로 많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도 뇌질환과 싸울 의사가 부족한 셈이다. 의사가 부족하다 보니 진단과 치료에 시간적, 금전적 비용이 많이 투입된다.

이 교수는 뉴로매치 상용화로 뇌 질환 진단·치료 비용이 현저히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 교수는 “미국 같은 선진국도 신경외과 의사가 2만4000명 중 1명에 불과하고, 대부분 환자는 의사를 만나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며 “(뉴로매치는) 뇌 질환에 대한 정보를 시스템화하기 때문에 의료 비용을 줄이고, 어디서든 환자를 볼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뇌전증 진단·치료를 첫 번째 솔루션으로 선보인 이후 파킨슨과 치매, 자폐증, 수면장애로 영역을 넓힐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이진형 스탠퍼드대 교수가 창업한 엘비스가 국내 기업 옵트바이오의 천연물 소재 금목서 추출물 영향을 뇌파 이미징한 모습. 금목서의 영향으로 뇌의 안정과 휴식에 관여하는 알파(Alpha)파가 활성화된 것을 볼 수 있다./옵트바이오

뇌 질환을 정복하는 과정은 물론 쉽지 않았다. 뇌 회로도 연구에 뛰어든 2007년만 해도 주변에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고, 연구에 필요한 정보도 없었다. 이 교수는 “연구를 돌 쌓기에 비유하면 내 연구는 만들어진 돌탑 위에 돌 놓는 것이 아닌 주춧돌부터 다져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굉장히 힘들었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며 “하지만 선구자가 될 만한 기술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뉴로매치 상용화를 앞두고 있지만, 이 교수는 이제 겨우 한발 뗐을 뿐이라고 자평했다. 그는 “이제 겨우 주춧돌을 깔고 이런 집을 지어야겠다는 걸 알 수 있는 단계에 왔다”면서 “뉴로매치가 주는 기회는 많다. 어떤 교수는 뉴로매치 내용을 듣더니 ‘이걸 사용하는 모든 연구가 논문이 될 수 있겠다’고 평가해주기도 했다”고 말하며 웃었다.

이 교수는 한국 과학 발전을 위한 조언도 남겼다. 가장 중요한 건 해외와 국내를 잇는 다리다. 과학기술이 빠르게 변하는 디지털 시대에는 과학기술인 사이의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가 활발히 공유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번 세계한인과학기술인대회를 앞으로도 한인 과학자들의 만남의 장으로 정착시켜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교수는 “다른 국가에 비해 전 세계로 뻗어간 한인 과학자들에 대한 지원이 의외로 없다”며 “언어와 문화가 같은 한인 과학자들이 서로 협력할 수 있도록 지원해 리더십 있는 기술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젊은 세대들에게 과학기술의 힘을 이해시킨다면 과학자의 길을 자연스럽게 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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