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를 자처한 정조가 “뒤쥭박쥭”이라고 쓴 이유
흔히 언어를 생각을 담는 그릇이라고 한다. 얼핏 당연하게 느껴지는 이 말에 사실 어폐가 있다. 언어와 생각이 별개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언어를 벗어난 생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만큼 어떤 언어를, 어떤 방식으로 사용했느냐는 그 자체로 역사 연구의 중요한 주제다. 장지연의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푸른역사 펴냄)가 주목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학부 졸업논문으로는 조선 중기, 석사논문은 여말선초, 박사논문에선 통일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 지은이는 역사 속 다양한 언어와 매체가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두루 살핀다. 묵직한 주제의식을 배꼽 빠지는 유머로 버무린 이 책은, 무엇보다 언어를 매개로 ‘한국사’를 ‘문명사’로 전환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책은 우선 세종대왕 이전까지 한반도 사람들의 언어생활이 한문에 지배당했다는 오랜 통념에 반기를 든다. 한자를 쓴다고 다 한문은 아니다. 한자의 뜻과 음을 빌려 우리말을 표기하던 이두와 향찰, 구결은 고려 말까지 건재했다. 애초 불교가 통치이념으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절인 만큼, 한문은 범어(산스크리트어)의 번역어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한문이 고려 시대 내내 찬밥 신세였던 건 아니다. 몽골의 부마국이 된 고려는 오랜 세월 축적한 한인(漢人) 문화를 거대한 유목제국에 매개했다. 한문은 고려인의 무기였다.
한문과 한글이라는 이항대립에서 벗어나면 훈민정음 창제도 새롭게 읽힌다. 세종의 지향은 역사 속 중국이 아닌 초월적 보편문명에 있었다. 훈민정음은 ‘문명’에 다가설 수 있게끔 도와주는 도구였다. 유교 경전을 한글로 풀어쓴 언해본이 퍼지며 역으로 한문을 익힌 사람들이 이전보다 크게 늘어났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한문 조서 하나 해독했다고 신라에서 손꼽히는 문장가로 대접받았던 강수는, 영남의 시골 선비들도 100m짜리 한문 두루마리를 턱턱 만들 수 있게 된 조선 말기에는 명함도 내밀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갈고닦은들 어디까지나 남의 말이던 한문을 쓰는 데 지친 남성 엘리트에게 한글은 감정의 피난처였다. 군사(君師)를 자처한 정조도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 편지에서 “뒤쥭박쥭”만은 굳이 한글로 썼다. 여성에게 한글은 더 각별했다. 양반가 여성은 나라가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꾸준히 언문으로 쓴 상언(上言)을 올렸다. ‘격이 낮은’ 언문이야말로 민감한 정치 분쟁을 피해가며 무엇보다 ‘진정성’을 드러내기에 제격이란 점을 전략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사람들은 언어와 매체를 넘나들며 공적인 열망을 실현했고, 권력에 은밀히 저항했으며, 팍팍한 삶에 숨통을 틔워왔다. 영어와 일어, 한자가 뒤섞인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우리는 그 후예다.
유찬근 대학원생
21이 찜한 새 책
궁금한 건 당신
정성은 지음, 안온북스 펴냄, 1만6천원
부제는 ‘정성은 대화 산문집’인데, ‘인터뷰’가 아닌 ‘대화’라는 표현에서 책의 특별함이 드러난다. 글 쓰고 영상 만드는 일을 하는 저자가 일상에서 만난 택시기사, 청소 노동자, 이삿짐 고수, 세탁소·식당 등 자영업을 하는 동포 등과 나눈 이야기를 담았다. 저자는 “누군가와 깊이 나눈 대화는 마음속에 남아, 위기의 순간마다 나를 구했다”고 말한다.
살리는 맛
이라영·전범선 지음, 동녘 펴냄, 1만5천원
권력과 저항에 관한 예리한 감각을 빛내온 예술사회학자 이라영과 동물권 활동가이자 노래하는 전범선이 편지글로 주고받은 비건 이야기. 맛집과 먹방 정보 속에서 비거니즘은 단순한 채식이 아니라 세상과 연결된 책임감 있는 생활양식이자 폭력과 착취에 저항하는 실천이란 점을 일깨운다. 솔직하고 직설적인 격정 토로와 고백이 후련함까지 선사한다.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상담소
전홍진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2만원
3년 전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으로 독자의 커다란 관심을 받은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새 책을 냈다. 민감하고 예민한 사람들이 겪는 곤혹스러운 상황을 섬세하면서도 다정하게 다뤄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도움을 준다. <한겨레> 토요판 ‘예민과 둔감 사이’ 칼럼에 연재한 글을 모으고 더욱 자세히 살을 붙였다.
사람을 잇다 사람이 있다 삼달다방
박옥순 등 지음, 이상엽 엮음, 미니멈 펴냄, 2만원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에는 기적 같고 예술 같은 공간 ‘삼달다방’이 있다. 배리어프리로 만들어진 삼달다방은 우림건설에서 사회사업과 문화기획을 20년간 담당한 이상엽과 배우자인 박옥순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대표가 운영한다. 장애인, 성소수자, 청소년, 이주노동자 등 사회의 비주류로서 차별받는 사람들을 돕는 사람들을 돕는 공간의 가슴 벅찬 이야기.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