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랑스러운 여자, 가수 정미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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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정미애는 맑은 사람이다. 목소리가 맑고, 미소가 맑고, 삶을 대하는 가치관이 맑다. 티끌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순수하다. 네 아이를 키우는 엄마 또는 삶을 노래하는 트로트 가수 이전에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랑스러운 여자다. 그래서일까? 그녀와 이야기를 나눈 한 시간이 지났을 때쯤 복잡했던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솔직하고 당당한데, 말과 행동에서 상대방을 향한 배려심이 느껴진다. 단언컨대 그녀는 짧은 순간에도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할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정미애가 시련을 만났다. 지난 2년 동안 암 중에서도 ‘나쁜 암’에 속하는 설암과 싸운 것이다. 목소리와 노래, 무대를 포기한 채 오직 ‘살 수 있게만 해달라’고 빌면서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을까? “이제는 어떠한 시련에도 끄떡없다”고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공개한다.
나에게 암이 찾아왔다
“넷째를 임신했을 때도 무거운 몸으로 무대를 소화했어요. 몸은 힘들었지만 즐거웠죠. 최근 몇 년이 저에게는 강행군이었나봐요. 넷째를 출산한 후 피로감과 우울감이 한 번에 몰려오더라고요. ‘이제는 좀 편하게 살아보고 싶다’, ‘나다운 나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중에 설암을 진단받았는데…. 힘들었어요. 표현하기 어려어요. 설명도 할 수 없고요. 솔직히 제가 어떤 표현을 한다고 해도 공감하기 어려울 거예요. 그냥 힘들었어요.”
욕심이었을까? 넷째 아이를 출산한 후 40여 일 만에 무대에 복귀했던 것이. 무대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몸을 추스를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음에도 복귀를 강행했었다. 그렇게 다시 무대에 오르면서 그녀는 스스로 암의 전조 증상을 느끼고 있었다. 체력이 전과 다르다는 걸 느꼈고, 면역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매일 피곤했고, 매일 아팠다. 암이 찾아오고 있었던 거였다.
“입안의 염증이 너무 오랫동안 낫질 않아 병원에 갔는데 ‘아직’ 암은 아니었죠. 염증 조직이 변형돼 그냥 두면 암이 될 수도 있는 상태였어요. 의사가 잘라내자고 하기에 싫다고 했죠. 저는 노래를 하는 사람이라서 혀의 일부를 잘라낸다는 게 상상이 안 됐어요. 단순한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었죠.”
아플 때 아이들이 많이 의지가 될 거 같잖아요? 아니에요.
‘내가 아프면 아이들은 어떡하지?’ 불안감이 정말 큽니다.
아플 때 자식을 생각하면 더 슬퍼요. 그때 가장 의지가 되는 건 남편이에요.
“의사가 ‘아’ 하고 탄식하며 암이 전이됐을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요. 멘탈이 무너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죠. 슬픈데 슬프지 않은 기분이랄까요. 암이라는 걸 확인하고 수술하기까지 그 며칠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르겠어요. ‘슬프다’, ‘우울하다’, ‘괴롭다’라는 단어로 표현이 안 되는 감정이었죠.”
그녀는 의사 앞에서 노래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2019년 TV조선 예능 <미스트롯>에서 선에 당선되며 얻은 기회를 이대로 놓칠 수 없었다. 정미애에게 무대는 꿈 이상이었다.
“의사가 다시는 말을 못 할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가수인데 노래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죠. 의사가 대답을 못 하더라고요. 암흑이었습니다. 저도 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죠.”
목소리를 포기하기로 했다 정미애는 대학 병원으로 옮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술받을 수 있게 됐다. 보통 암 환자가 진료를 시작하고 수술받기까지 수개월이 걸리는데 상당히 빠른 진행이었다. 정미애는 운이 좋았다고 표현했다.
“대학 병원은 기다림의 연속이라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았어요. 천운이었죠. 넷째 아이가 돌이 되기 전에 암 진단을 받았고 돌잔치가 끝난 후 바로 수술했어요. 생각보다 빨리 수술받을 수 있었고, 혀의 3분의 1을 잘라냈습니다. 의사는 제가 노래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수술했죠. 그런데 예후가 좋지 않을 수 있다는 말에 절망했어요. 젊을수록 전이가 빠르다는 데 속수무책이었죠. 그때 마음먹었습니다. ‘가수를 포기해야겠다’고.”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생때같은 자식이 넷이나 있었기에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노래할 수 없어도 괜찮았다. 무대에 다시 오르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았다. 살 수만 있다면.
“수술장에 들어가는 날 친정어머니에게 말씀드렸어요. 전화기 너머로 어머니가 엉엉 우시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이렇게 죽지 않겠다’고 말씀드리고 수술장에 들어갔죠. 수술 후에는 치료와 회복에만 집중했어요. 노래를 다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고, 다시 할 수 있기를 바라지도 않았어요. 아이들이 우선이었고, 가족이 먼저였거든요.”
수술 후 항암치료나 방사선치료를 하게 되면 영영 무대에 오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방사선치료 부작용으로 정상 세포까지 죽게 될 것이고, 발음은 점점 어눌해질 것이며, 노래는커녕 말도 못 하게 될 것이었다. 목소리를, 노래하기를 포기했던 정미애는 희망을 희망하지 않았었다.
“다행히 수술 경과가 좋았어요. 항암이나 방사선치료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죠. 전이된 곳이 하나도 없었어요. 하루라도 빨리 발견해 바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그토록 원망했던 하늘이 이렇게 감사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어요.”
가톨릭 신자로 성당에 다니긴 했지만 기도라곤 해본 적 없었던 그녀는 암을 발견한 후 처음으로 미사포를 쓰고 묵주를 들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무도 듣지 못할 기도를 청하고 나면 조금 나았다. 일주일을 버틸 힘이 기도에 있었다.
“‘이거 해주세요’, ‘저거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지 않았어요. 편안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죠. 정말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사람이 사람에게 의지하는 건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종교가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이렇게 얘기하면 혹시 모를 좋은 일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작은 기대나 희망이 생기는 것도 같고요.”
그리고 가족이 있었다. 같은 기획사에서 함께 무명 시절을 보내며 사랑을 키워온 남편, 사랑꾼 남편을 쏙 빼닮은 4명의 사랑둥이, 평생 딸을 응원하며 살아온 어머니를 생각하면 힘을 낼 수밖에 없었다.
“다시 수술 당시의 이야기를 하자면, 남편이 더 많이 울었어요. 연애, 결혼, 임신, 출산, 육아, 그리고 암 수술까지… 모든 것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슬펐대요. 남편과 마주 앉아 많이 울었어요. 얼마나 울었는지 지금은 눈물조차 나지 않네요.”
정미애가 말을 이었다. 딸에 대한 기대감과 환희로 가득했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병을 차마 알릴 수 없었다.
“친정어머니가 저에게 거는 기대가 엄청 컸어요. 어릴 때부터 소리를 배웠는데, 어머니가 떠밀다시피 해서 24살에 가수를 하겠다고 서울로 올라왔죠. 말씀은 안 하셨지만 얼마나 애가 타셨겠어요. 딸내미만 서울에 올려 보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겠죠. 저의 성공만을 위해 기도하셨던 분인데…. 제가 아프다고 했더니 틈도 없이 노래는 안 해도 된다고 하시더군요. 딸이 건강하게 오래 잘 사는 게 더 큰 성공이 아니겠느냐면서요. 살아만 있어달라는 그 말씀이 어찌나 슬프던지요. 참 많이 울었어요.”
이런 불효가 어디 또 있겠습니까
“살가운 성격이 아니다 보니 가족들의 불만이 많아요.(웃음) 좋게 말하면 츤데레, 나쁘게 말하면 터프 우먼이죠. 그래서 늘 미안합니다. 아이들에게는 한 명 한 명 살갑게 챙기지 못해 미안하고, 남편에게는 따뜻하지 못해 미안하죠. 엄마에게는 늘 부탁만 하는 딸이라 미안하고요.”
정미애는 늘 같은 자리에 있을 것이다. 예전과 변함없이 무뚝뚝할 것이고, 예전과 다름없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따뜻할 것이다. 중요한 건 가족들의 반응이다.
“아이들이 항상 저더러 멋있다고 해요. 학교에 가면 친구들에게 ‘우리 엄마 가수다’라고 자랑하는 모양이에요. 제가 한 방송에서 불렀던 노래를 셋째 아이가 따라 부르고 있는 걸 보고 항상 최선을 다해 노래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살갑지 못한 엄마에게 관심 가져줘 너무 고마워요.”
같은 연예 기획사에서 만난 남편이 회사 대표가 됐다. 정미애의 남편 역시 가수를 지망했지만 이런저런 사연으로 이루지 못한 꿈을 아내가 대신 이뤄주고 있는 셈이다. 이날 화보 촬영에는 남편이자 대표가 동행했는데, 아내를 지켜보는 눈에서 따뜻함이 느껴졌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만 챙기는 ‘찐 부부 바이브’랄까.
“같이 일하다 보면 불편할 때가 종종 있어요. 이건 남편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서로 더 조심하려고 하죠. 남편이요? 꾸준해요. 변함이 없죠.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게 장점이에요. 때로는 변화를 추구해야 하는데도 우직한 모습은 단점일 때도 있고요.”
말끝에 눈이 마주친 정미애와 남편이 소리 내어 웃었다. 오래된 친구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를 ‘소울메이트’라 부른다.
“아플 때 아이들이 많이 의지가 될 거 같잖아요? 아니에요. 가장 큰 힘은 남편이죠. 아이들은 짐이 됩니다. 마음의 짐이요. ‘내가 아프면 아이들은 어떡하지?’, ‘내가 죽으면 아이들은?’ 이런 생각에서 오는 불안감이 정말 큽니다. 아플 때 자식을 생각하면 더 슬퍼요. 그때 가장 의지가 되는 건 남편뿐이에요. 이 자리를 빌려 남편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부모님에게는 한없이 죄스러운 딸이다. 무심한 성격이라 애교도 없는데 아프다는 이유로 네 손주를 맡겼으니 죄송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멀쩡하게 낳아주셨는데 제 몸을 제가 망가뜨려 너무 죄송했어요. 어머니는 ‘몸 망가지니까 아이 많이 낳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 정도로 제 몸을 끔찍이 생각하셨죠. 그런데 암에 걸려 수술까지 했으니…. 이런 불효녀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젊었을 때가 전성기라고 생각하시죠? 아닙니다.
힘든 시간이 다 지나가고 난 후, 내가 오롯이 나를 즐길 수 있을 때가 전성기입니다.
저는 이제 무슨 일이 생겨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겼어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지요.
남편은 나의 소울메이트
“예전에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 암 투병 소식을 전하지 못했어요. 팬들에게 알리면 크게 걱정할 거라는 걸 알기에 그 마음을 보듬기가 힘들 것 같았죠. 팬들도 충격이 클 거 같았고 제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그때 알리고 싶었는데 이제는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 사는 이야기를 그리는 프로그램이라 생각했던 <인간극장>을 통해 알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인간극장> 방송 이후 주위에서 많은 연락을 받았다. 방송 프로그램 출연 섭외도 이어졌다. 말 그대로 <인간극장>인 그녀의 투병기와 극복기는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저보다는 제 남편에게 연락이 쏟아졌어요. 아무래도 동료들도 제게 연락하기 힘들어하는 거 같았죠. 연락을 안 줘도 그런가 보다 합니다. 그 마음이 어떨지 저조차 상상이 안 되기 때문에 제게 직접 연락하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멀리서도 마음으로 응원해주는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정미애는 요즘 춤을 배운다. 지난 2월 공개한 곡 ‘걱정 붙들어 매’가 디스코 장르의 댄스 음악이라 겸사겸사 댄스를 시작했는데 취미가 됐다. 노래 가사처럼 자신감이 생겼고, 자존감도 높아졌다. 다시 말해 그녀는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춤을 추는 그 순간만큼은 일과 육아의 스트레스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어요. 아이들이 있어서 행복하지만, 시간이 없는 것 같아 슬플 때가 있거든요. 첫아이를 낳은 후 지금까지 오롯이 저만의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춤추는 순간만큼은 온전한 저만의 시간이잖아요. 나를 위해 시간을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행복합니다.”
변화는 또 있었다. 화장에는 도통 취미가 없던 그녀가 스스로를 꾸미기 시작한 것이다. 동네 아줌마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더욱 열심이다. 정미애는 이러한 변화를 ‘투자’라고 말했다.
“전에는 정말 대충 입고 다녔어요. 화장한다는 것 자체를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죠. 이제는 귀고리도 하고, 옷도 예쁘게 입으려고 합니다. 저한테 시간을 투자하는 거죠. 짧게는 5분, 길게는 1시간가량이지만 저를 예쁘게 하기 위한 그 시간이 참 소중합니다.”
정미애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에 감사하다고 했다. 몰라서, 익숙해서, 편해서 지나치곤 했던 모든 것이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하다는 걸 새삼 깨닫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지금 매일 성장하고 있다.
“암 투병 전에는 몰랐던 것 중 하나가 KBS2 예능 <불후의 명곡> 무대의 소중함이에요. 그동안 <불후의 명곡>에 여덟 번 출연했는데, 감사하긴 했지만 소중하다고 여겨본 적은 없었거든요. 수술하면서 다시는 노래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수술 후에 <불후의 명곡> 무대에 올랐을 때 감정이 요동치더군요. 커튼 뒤에 숨어 눈물을 삼키고 있는데 조명이 들어왔고, 겨우겨우 무대를 마쳤죠. 전에는 몰랐던 무대의 소중함, 다시 노래할 수 있다는 감격스러움 등 다양한 감정이 밀려왔던 것 같아요.”
정미애는 예쁘다. 마음이 예쁘고, 말이 예쁘다. 그렇기에 외모는 더욱 예뻐 보인다. 그녀는 살아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전성기라고 말했다.
“젊었을 때가 전성기라고 생각하시죠? 아닙니다. 힘든 시간이 다 지나가고 난 후에 내가 오롯이 나를 즐길 수 있을 때가 전성기입니다. 저는 이제 무슨 일이 생겨도 다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겼어요. 단단해졌고, 강해졌죠. 투병 전의 저라면 할 수 없었을 일도 지금은 척척 해냅니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정미애는 비로소 다시 태어났다. 아내도, 엄마도, 딸도 아닌 진짜 정미애로. 아픔을 이겨내고 돌아온 그녀에게 꽃길만 펼쳐질 것이다.
기획 : 하은정 기자 | 취재 : 이예지(프리랜서) | 사진 : 이대원 | 스타일리스트 : 이효선 | 헤어&메이크업 : 유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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