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 10주년으로 본 K팝의 길과 희망 [김희경의 컬처 인사이트]
“방탄소년단(BTS)의 데뷔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전 세계 팬들이 한국을 찾고 있다.”
미국 CNN과 AP 등 주요 외신들은 6월 14일 BTS의 데뷔 10주년 관련 보도를 일제히 쏟아냈다. BTS가 걸어온 길, 국내외 팬들의 축하 인사, BTS의 상징색인 보랏빛으로 물든 서울의 모습을 가득 담아 소개했다. 미국 빌보드는 “BTS의 10년간 업적을 기리기 위해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직접 선정해 달라”며 홈페이지에 온라인 투표까지 진행했다. 특정 아티스트, 그것도 아시아에서 탄생한 아이돌 그룹의 10주년 소식이 이토록 외신을 화려하게 장식한 적은 없었다.
더 신기한 일도 있었다. 10주년 행사엔 BTS 멤버 전원이 군복무 등으로 인해 함께 참석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12만 명을 포함해 40만 명에 달하는 팬들이 BTS를 축하하기 위해 서울에 집결했다. 이에 따라 한 도시 전체가 온통 축제 분위기로 바뀐 것 역시 좀처럼 보기 드문 현상이다. K팝 역사에 길이 남을 의미 있고 영광된 순간이었다.
진정성으로 한계를 깨부수다
요즘 나타나고 있는 K팝 관련 현상들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도 자주 사용되는 게임 용어 하나가 떠오른다. ‘다른 사람이 된 듯 한 차원 높은 단계로 나아갔다’는 의미를 가진 ‘어나더 레벨(another level)’이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K팝은 실제 다른 차원으로 접어들었다. 체급과 스케일은 물론 영향력까지 크게 달라졌다. 더 이상 외국인들에게 “두 유 노(Do you know) 강남스타일?”, “두 유 노 BTS?”를 물을 필요도 없다. 이젠 전 세계 K팝 팬들이 강력한 응집력으로 뭉치고 있는 것은 물론 하나의 거대한 보편적 현상이 돼 흐르고 있다.
K팝이 성장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한계들을 끊임없이 극복해 온 덕분이다. 애초에 K팝 자체가 가진 잠재력도 컸다. 워낙 흥이 넘치는 민족인 만큼 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해외로 뻗어 나갈 여지도 컸다. 긴 호흡의 드라마나 영화보다 훨씬 가볍고 국가별 문화적 간극이 좁은 편이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K팝은 한류 초기 때부터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 왔다.
여기에 ‘시스템’까지 깔렸다. 한국의 기획사들은 다른 나라보다 훨씬 체계적인 시스템을 만들어 K팝 시장을 키워 왔다. ‘아이돌’이란 강력한 ‘인적 자본(human capital)’을 구성하고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재능 있는 연습생들을 발굴해 이들에게 오랜 시간 투자하고 교육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각 아이돌 멤버들은 갈수록 파급력이 커지는 ‘성장하는 인적 자본’이 돼 갔다.
한국의 아이돌 그룹들은 1990년대 후반부터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일본과 동남아를 중심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언어적 한계가 있기는 했지만 강렬한 후렴구를 반복하는 ‘후크송’을 통해 떼창을 유도하며 이를 극복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속력과 확장성은 약한 편이었다.
2010년대 K팝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일본과 동남아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는 게 핵심이었다. 아예 처음부터 미국·중국과 같은 보다 큰 시장을 목표로 삼았다. 다양한 개성을 가진 멤버들로 구성해 10명 이상의 그룹을 만들기도 했고 중국인 등 외국인 멤버들도 뽑았다.
하지만 지나친 상업화로 인해 점차 한계에 부닥쳤다. 갈수록 노래도 비슷해져 갔고 아이돌의 차별화된 특색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시장에서 아이돌은 하나의 ‘상품’처럼 취급되기 일쑤였고 한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팬덤이 장기간 지속되지 못했다.
이 고착화된 한계는 BTS의 등장과 성장으로 깨지기 시작했다. 중소형 기획사에서 탄생한 이 그룹에 처음부터 관심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BTS는 직접 미국에 건너가 전단지를 나눠 주며 글로벌 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러브 유어셀프(Love Yourself)’로 대표되는 강력한 메시지를 꺼내들며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시스템이 가진 딱딱하고 정형화된 틀과 한계를 깨부순 것은 아티스트만의 철학과 진정성이 담긴 메시지였다.
그렇게 시작된 변화는 거대하고 막강했다.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높은 차원의 문화까지 만들어졌다. 40만 명이 모인 BTS 데뷔 10주년 행사는 이를 또 한 번 증명해 냈다. 이 행사는 많은 인파에도 안전사고 없이 마무리됐다. 쓰레기를 자발적으로 수거하는 성숙한 시민 의식까지 빛났다. 아티스트와 팬들이 좋은 가치를 나누고 동반 성장한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초호황기 맞은 K팝 시장, 그리고 색다른 도전
K팝 시장에선 색다른 실험과 도전도 진행되고 있다. K팝은 이제 국적과 인종을 초월해 시스템을 접목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신곡 ‘카르마’를 지난 5월 공개한 걸그룹 ‘블랙스완’엔 한국인이 한 명도 없다. 멤버들의 국적과 인종을 살펴보면 K팝 그룹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양하다. 미국 백인 멤버를 비롯해 독일 출신의 브라질 국적 백인, 세네갈 출신의 벨기에 국적 흑인, 인도인으로 구성돼 있다.
아예 타깃 시장에서 데뷔하고 활동하는 ‘현지화 그룹’도 있다. 2020년 JYP엔터테인먼트도 일본 음악 시장에서 ‘니쥬’를 결성해 선보였다. 이들은 전원 일본인이고 노래도 일본어로 부른다. 하지만 니쥬 역시 K팝 시스템을 접목해 만들었기 때문에 K팝 그룹에 해당한다.
이런 움직임은 논란의 여지도 있다. ‘한국인이 한국어로 노래를 해야 K팝’이란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다. 하지만 한국의 기획사들은 K팝을 더욱 빠르고 광범위하게 확산시키기 위해선 ‘개방성’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다. 그래서 K팝이 적극 공략해야 할 시장을 중심으로 전략을 짜고 이 시장과 관련성이 높은 멤버들로 그룹을 만들고 있다. 그 대신 전 세계인들이 열광하고 있는 K팝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고 있다. 화려하면서도 절도 있는 칼군무, 다양한 장르를 결합한 ‘매시 업(mash up)’ 방식으로 만들어진 참신하면서도 대중적인 음악이 핵심이다.
꾸준한 도전과 확장 덕분에 K팝의 산업 규모는 나날이 커지고 있다. 한국 영화 등 다른 장르가 주춤하는 사이 K팝은 중심을 지키며 나아가고 있다. 심지어 올해 연간 실적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할 것이란 예상까지 나오고 있다. 교보증권에 따르면 하이브·JYP엔터테인먼트·SM엔터테인먼트·YG엔터테인먼트 등 한국의 엔터테인먼트업계 빅 4의 올해 합산 매출은 전년 대비 19.8% 증가한 4조300억원을 기록할 것으로 추정된다. 영업이익은 6418억원으로 사상 최대 기록을 세울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수치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K팝을 떠받치고 있는 팬덤의 지속 가능성이다. K팝을 꾸준히 듣고 소비하는 팬들이 점차 사라진다면 이 기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
결국 BTS처럼 팬들과 공유할 메시지와 가치를 지속적으로 고민해야 한다. 다행히 최근 이 같은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이제 아티스트·기획사·창작자들은 노래를 만들 때 ‘선한 영향력’까지 고려한다. 팬들에게 전할 메시지, 그 메시지가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을 다각도로 고민한다.
이번 BTS 데뷔 10주년에서 리더 RM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좋은 경험을 하게 해주신 모든 아미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같이 한 번 잘 살아봅시다, 이놈의 세상 속에서. 우리 존재 파이팅!” 쉽고도 명쾌한 메시지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같이’의 가치. K팝은 앞으로도 이를 발판으로 더욱 발전하고 확장되지 않을까.
김희경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pressi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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