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 흥망성쇠 함께한 ‘어린 광부’…“태백에 아직 사람 살아요”
40대 이진형씨와 석탄산업
석탄산업의 두번째 전성기와 함께 이진형(49)의 집에도 황금기가 시작됐다. 경북 영덕에서 농사짓던 아버지(1935년생)가 1978년 ‘검은 황금’을 찾아 느지막한 나이에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 광부가 되면서다. 장성광업소는 단일 탄광으로는 생산량이 국내 최대 규모였다. 이진형이 4살 때 일이다.
“그때 아버지 첫 월급이 8만원이었대요. 교사나 경찰, 일반 사무원보다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광업소 직원들한테는 매달 전표가 나왔는데, 배급소에 가져가면 쌀, 밀가루, 돼지고기 같은 걸로 바꿔줬어요.”
11평(37㎡)짜리 사택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내부 구조는 당시 서울의 신식 아파트를 베껴왔다고 했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네 아이들이 잘사는 광부 아들이라고 부러워했어요.”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73년과 1978년 중동발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정부의 에너지정책이 수입에 의존하던 석유에서 국내 생산이 가능한 석탄 중심으로 다시 바뀌었다. 정부가 석탄산업에 지원하던 각종 보조금에 면세 조치까지 더해지면서 1966년 ‘연탄파동’으로 전성기가 끝나는 듯했던 석탄산업이 제2의 호황을 누리게 됐다.
대한석탄공사가 발간한 ‘한국의 석탄산업 100년’ 보고서를 보면, 국내 무연탄 생산량은 1982년에 2천만t을 돌파하고, 6년 뒤인 1988년 사상 최대인 2560만t을 기록했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부터 석탄을 캐온 태백에선 1980년대 중반 ‘똥개도 만원짜리 물고 다닌다’는 얘기가 돌 만큼 도시가 흥청망청댔다고 한다. 태백시 인구도 1987년에 12만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제2의 전성기는 그러나 오래가지 않았다. 정부가 1987년부터 ‘석탄산업 합리화’를 내걸고 폐광과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이진형 일가의 아름다운 시절도 끝났다.
“그때부터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큰 데모가 1990년대 초중반까지 몇년을 이어졌죠. 툭하면 화염병과 최루탄이 날아다녔어요. 그렇게 태백 전체가 뒤숭숭해진 사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진폐증을 오래 앓으셨는데, 그땐 휴식도 보상도 제대로 못 받고 그럴 때였어요.”
아버지의 부재는 가족의 시련으로 이어졌다. 어머니가 갱 안에서 사용하는 안전등 배터리의 증류수 보충작업으로 생계를 이었고, 다섯살 터울인 셋째 형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장성광업소에 입사했다.
석탄산업의 쇠락은 가팔랐다. 1988년 347개에 이르던 전국 탄광이 8년 뒤인 1996년 11개로 급감했다. 그사이 6만8500명의 탄광노동자는 1만명 안팎으로 줄었다. 정부가 1995년 12월 ‘폐광지역개발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해 지원을 본격화했지만, 지역의 몰락을 되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진형도 그 무렵 일자리를 찾아 태백을 떠났다. 대도시를 떠돌며 택배 등 배달 업종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1999년 결혼과 함께 아기까지 생기자, 생계가 막막했던 그는 어머니와 형이 있는 태백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와 형을 이어 장성광업소에 들어갔다.
“막장일을 하겠다니 어머니가 사흘을 뜯어말렸습니다. 아내는 울기만 했죠. 2000년 7월17일입니다. 첫날 갱에 들어가 마이너스(해수면 아래) 300m까지 내려가는데, 앞은 점점 안 보이고, 땀은 비 오듯 하고, 숨조차 안 쉬어지더라고요.”
이진형은 탄층을 찾아 터널을 뚫는 굴진 작업조에 투입됐다. 3개월 수련 과정을 거쳐 정직원이 되니 수입이 늘었다. 일이 몸에 익자 돈 버는 재미가 쏠쏠했다. 하지만 곧 힘든 고비가 찾아왔다. 2003년 작업조 선임 광부가 갱내에서 궤도차에 끼여 숨졌다.
“안전모가 박살나고, 몸통이 완전히 으스러졌어요. 선배 시신을 내 손으로 수습해 밖으로 옮겼지요. 그 뒤로는 갱에 들어가기가 무서웠습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막장에서 일한다는 게 목숨을 거는 일처럼 여겨졌으니까요.”
1남 1녀를 남부럽잖게 키우겠단 일념으로 트라우마와 싸웠다. 세월과 함께 마음의 상처도 아무는 듯했다. 하지만 ‘무사고’의 행운은 막장 생활 내내 이어지진 않았다. 폐광 논의가 한창이던 2021년 5월27일 굴진 작업 중 낙석에 맞아 정신을 잃었다. 다발성 골절이었다. 십자인대가 끊어지고, 대퇴부와 쇄골이 부러졌다. 서울의 큰 병원에서 두차례 수술을 받았다.
“후유증과 무서움 때문에 광부로 사는 게 어렵겠더라고요. 고민 끝에 지난해 6월30일자로 광업소를 그만뒀습니다. 장성탄광에서 제가 가장 나이 어린 광부였는데.”
지난달 30일 장성광업소 인근 장성동 화신촌에서 만난 이진형의 얼굴에선 홀가분함과 쓸쓸함이 교차했다. 이날 언론은 전남 화순광업소의 폐광 소식을 일제히 보도했다.
“장성탄광이 문 닫아도 화순처럼 언론이 크게 써줄까요?”
이진형이 폐허로 변해가는 장성동 화신촌 옛 시가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화신촌은 1990년대 초반까지도 강원 남부 내륙의 최대 유흥가였다. 이진형은 최근 광부의 후손들이 미래에도 이곳을 터전 삼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 ‘화신촌사람들’이라는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탄광이 쓰임을 다하고 필요가 없어졌으면 문을 닫아야죠. 하지만 여기 태백은 여전히 사람이 살고, 앞으로도 살아야 할 곳입니다. 이 나라 산업화를 떠받쳐온 광부들과 그 후손이 명예와 자부심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게 나라도 국민도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일터였던 장성광업소는 2024년 문을 닫는다. 뒤이어 삼척 도계광업소가 2025년 폐광하고 나면, 국내에는 발전 연료 공급용 민영 탄광인 삼척 경동광업소만 남게 된다.
글·사진 이정하 기자 jungha98@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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