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하는 죽음’ 말고 ‘맞는 죽음’ …“영정사진 예쁘게 찍어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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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가는 길에 동행할 사진이니 예쁘게 찍어줘유.”
흘러버린 세월만큼 허리가 굽고, 하얗게 센 머리카락은 은실처럼 빛났다. ‘웃는 표정으로 찍어야 좋다’는 사진작가의 권유에 백발의 할머니가 금니를 드러내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지난달 22일 오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매탄2동 행정복지센터 강의실에 마련된 임시 사진관. 매탄2동에 사는 80살 이상 홀몸 노인들의 ‘만수무강 장수사진’ 무료 촬영으로 강의실 안팎이 시끌벅적했다. 한쪽에서 사진 촬영이 이어지는 사이, 다른 한쪽에선 메이크업과 머리 손질로 분주했다. 행사를 마련한 매탄2동지역사회보장협의체는 촬영 때 입을 한복을 준비하고 메이크업 아티스트까지 불러왔다.
■ 다 알지만, 장수사진이라는 ‘선의의 거짓말’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진관 사진’을 찍는다는 오배자(85)씨는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카메라 셔터 소리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남편 죽은 지는 20년도 더 됐어. 둘째 아들도 재작년에 심장마비로 하늘나라 갔고. 서울대학 보낸 첫째 아들은 교통사고 당한 뒤로 인생이 망가져 버렸어. 여즉 병원에 있는데, 거동은커녕 지난 일을 기억도 못 해. 작년에 첫째를 서울에서 수원으로 옮기면서 나도 이사 왔어. 애지중지하던 자식이 그렇게 됐는데 내 삶이 어땠을 것 같아? 무너졌지 완전히. 영정사진으로 쓰려고 사진도 찍었는데, 내가 먼저 가면 남겨진 첫째는 어쩌나 그 생각뿐이야. 나 죽을 때를 내가 결정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 그러지 못하니 오늘도 버티고, 내일도 버티고, 계속 버티는 거지.” 오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는 동안, 주름진 눈가엔 물기가 촉촉이 번졌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정해진 결말’에 한 걸음 더 다가갔음을 뜻한다. 노인들 앞에서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 탓에 사진관 등에선 언제부턴가 ‘영정사진’을 ‘장수사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장수사진을 찍어두면 무병장수한다”는 ‘선의의 거짓말’도 생겼다.
그동안 영정사진을 미리 찍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영정을 준비하는 것 자체가 임박한 죽음을 자신과 주변에 고지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일지 몰라도 결국 죽는 거여. 장례식장 가 봐. 제대로 된 영정 한장 없이 가버린 친구들이 부지기수여.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고 생기 있을 때 찍었어야 하는데, 그땐 몰랐지. 장수사진? 오늘 찍는 게 영정이라는 것을 모르는 노인네가 여기 어디 있겠어?”
얼굴에 분칠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박아무개(81)씨의 말이다.
■ 미치도록 고독한 일상…말동무는 티브이뿐
신기봉(79)씨는 굳은 표정을 좀처럼 풀지 못했다. “웃어보시라”는 사진작가의 말에 주름진 입술을 더 앙다물었다. 신씨는 1970~80년대 중동 건설 현장을 누빈 ‘산업역군’이었다. 27살에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에 파견된 뒤 쿠웨이트, 리비아 등을 돌며 9년 동안 일을 해 당시 시세로 집 2채는 사고도 남을 만큼의 목돈을 마련했다고 한다. 귀국하면서 인생의 황금기가 펼쳐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의 삶은 귀국과 함께 36살에 멈춰버렸다.
“귀국해 보니, 마누라가 아들만 남기고 집을 나가버렸어. 1년 동안 술에 의지해 살다가 쥐약까지 먹었지. 근데 죽는 것도 내 맘대로 안 되더라고. 겨우 정신 차리고, 아파트 경비 일 하면서 지금까지 살았지. 죽을 때가 가까워오니 그래도 사진 한 장은 남겨야겠드라고. 살면서도 외로웠는데, 죽고 나서 빈소에 영정 한장 없으면 얼마나 쓸쓸하겠어?”
경제적 어려움, 신체적 노화의 고통만큼 홀몸 노인들의 삶을 짓누르는 것은 고독이다. ‘홀몸노인, 죽은 지 두달 만에 발견’ 같은 뉴스 헤드라인을 접하면, 나도 저렇게 되지 않을까 덜컥 두려움이 밀려오기도 한다. 혼자 죽는다는 것에 대한 공포는 자녀를 향한 원망으로 이어진다.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폐지를 주워다가 팔면 하루에 2300원 벌어. 이렇게 살려고 내가 아등바등, 악착같이 살았나 싶지. 딸린 자식들이 있으니 어떻게든 앞만 보고 살아왔는데, 자식새끼 키워봤자 아무 소용 없어. 테레비가 내 유일한 동무야. 종일 말할 사람이 없으니 테레비 소리 듣고 잠들고, 깨고.”
“인생이 허망하다”고 한 80대 노인은 그러면서도 자식들한테 혹여라도 비난이 돌아가지 않게 하려고 기자에게 몇번을 더 다짐받았다. “내 얼굴이랑 이름은 절대 나가면 안 돼. 애들한테 손해가 갈 수 있고, 늙어서 폐지 줍는 엄마가 창피할 수도 있으니까. 쉿! 쉿!”
■ 당하는 죽음에서 ‘맞는 죽음’으로 살고파
삶을 기품 있게 마무리짓고 싶다던 나옥순(80)씨의 표정과 말투에는 여유와 느긋함이 있었다.
“남편 먼저 일찍 보내고 40년 가까이 두 아이를 혼자 키웠어요. 아들은 세계 일류 기업에 취직해 미국에 정착했고, 딸은 학교 선생이 돼 잘살고 있고요. 그런데 정작 내 인생을 돌아보니, 애들 키우느라 안 해본 일 없이 살았어요. 나이를 먹으니 몸도 여기저기 고장 나고, 안 아픈 곳이 없네요. 죽음을 잘 준비하려고 오늘 여기 나왔어요. 애들이 알면 마음이 착잡할 수 있겠다 싶어 아예 말을 안 했어요. 지금까지 그래 왔듯 인생의 마무리도 저 스스로 준비해야죠.”
떠날 때 자녀들한테 남기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남에게 폐 끼치지 말고, 선하게 살거라. 지금처럼 얘들아.”
‘재능기부’ 차원에서 이날 무료로 사진을 찍어준 사진작가 서기수씨는 “죽음에 대한 논의를 기피하는 우리 사회의 문화가 좀 더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7년 동안 500명이 넘는 노인들의 영정사진을 찍었다는 그는 “처음 촬영을 시작했을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사진 찍으러 나오는 어르신들 표정들이 많이 밝아졌다”면서도 “여전히 죽음을 입에 올리는 것을 불경스럽게 여기는 경우가 많다. 삶과 죽음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듯, 다가오는 죽음을 여유 있고 담담하게 준비하는 문화가 확산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날 촬영에는 17명의 홀몸 노인이 참여했다. 사진은 액자에 담아 각자에게 전달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정하 기자 jungha98@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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