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자녀 합격 기도, 시험장선 첨단 장비로 부정행위… 베트남 수능 이모저모 [아세안 속으로]
편집자주
2023년 2월 한국일보의 세 번째 베트남 특파원으로 부임한 허경주 특파원이 ‘아세안 속으로’를 통해 혼자 알고 넘어가기 아까운 동남아시아 각국 사회·생활상을 소개합니다. 거리는 가깝지만 의외로 잘 몰랐던 아세안 10개국 이야기, 격주 목요일마다 함께하세요!
“10년을 위해서는 나무를 심어야 하고, 100년을 위해서는 사람을 키워야 한다.”
베트남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호찌민(1890~1969)이 생전 인재 양성 중요성을 역설하며 했던 말이다. 그가 사망한 지 5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베트남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명언 중 하나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베트남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10개국 중 가장 뜨거운 교육열을 자랑한다. 자녀 교육을 위해 집과 땅을 팔고, 수차례 이사를 다니는 ‘맹모’들의 사연이 이곳에선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교육에 대한 높은 관심을 가파른 경제성장의 배경으로 꼽는 목소리도 많다. 지난달 28, 29일 치러진 베트남 전국 대학 입학시험의 고사장 안팎 분위기를 통해 한국 못지않은 베트남의 교육열을 들여다봤다.
새 학기가 9월에 시작하는 베트남은 매년 6월 말~7월 초 한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과 비슷한 대입 시험을 치른다. 시험 결과에 따라 고교생들의 졸업 여부가 결정되고, 이 성적으로 대학에 지원한다. 재수생은 별도의 대입 시험을 본다. 올해 응시생은 102만여 명. 1일 차 문학(오전)·수학(오후), 2일 차 자연과학 또는 사회과학(오전)·외국어(오후) 등 크게 네 과목이다.
긴장한 학생들… ’후배 응원단’은 없어
28일 오전 6시 베트남 수도 하노이 중심가 난찐고등학교 앞. 시험 시작까지 두 시간이나 남았지만, 교복 입은 학생을 태운 오토바이가 끊임없이 밀려 들어왔다.
수험장 분위기는 한국 수능 시험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초등 5년, 중등 4년, 고등 3년간 배운 것을 이틀간 모두 쏟아부어야 하는 학생들은 교문 통과 순간까지도 공부 내용을 정리한 쪽지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학부모들은 긴장한 자녀의 손을 잡아주거나 꼭 안아주며 응원을 건넸다.
시험장 인근 사거리에서는 공안 다섯 명이 바리케이드를 친 채 부지런히 교통정리에 나섰다. 평소 좁은 도로에 차량 수십 대와 오토바이 수백 대가 한데 몰리며 무질서했던 것과 달리, 이날은 공안의 수신호에 일사불란하게 이동했다.
경적 소리마저 이날엔 작게 느껴졌다. 한국처럼 출근 시간을 늦추진 않았으나, 그만큼 대입 시험을 국가의 큰 이벤트 중 하나로 여긴다는 의미다. 공안 관계자는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각 시험장에 경찰 5~10명이 배치된다”며 “시험장 반경 100m 이내를 철저히 통제한다”고 설명했다.
교문 앞에선 파란색 단체 티셔츠를 입은 대학생 자원봉사자 10여 명이 교실을 찾는 수험생들을 도와줬다. 유학원과 오토바이 업체 등 각 기업들도 학교 앞에 자리를 펴고 물과 펜 등을 나눠주며 홍보에 나섰다. 다만 한국처럼 ‘후배 응원단’이 함성을 지르며 수험생들을 응원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부모들은 ‘최초 대학’서 합격 기원
수험생이 문제 풀이에 집중하는 동안, 학부모는 ‘기도의 시간’을 보낸다. 일부 학부모는 교문을 잡은 채 간절히 기도하기도 했다. 난찐고등학교 앞에서 막내딸을 기다리던 루옹반하이(61)는 “딸을 응원하려고 연차까지 쓰고 왔다”며 “시험 볼 때 너무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고 했는데 지금은 내가 더 긴장한 것 같다”고 했다.
하노이 중심가에 위치한 문묘국자감으로 향하는 학부모도 많다. 문묘는 공자의 위패를 모신 곳이지만, 1076년 개교한 베트남 최초의 대학(국자감)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한국 학부모들이 수능시험 전후로 교회나 성당, 절 등을 찾는 것처럼 베트남 학부모들도 과거 최고 인재 양성 장소에서 자녀의 합격을 비는 셈이다.
문묘에서 만난 응우엔란안(43)은 “딸이 공부를 열심히 해서 걱정을 많이 하진 않지만 시험엔 운도 필요하기 때문에 새벽 5시부터 조상님께 기도한 뒤에 왔다”며 “이곳의 신성한 기운이 아이에게 전해져 높은 점수를 받길 기원했다”고 말했다. ‘만지면 합격과 성공을 불러온다’는 문묘 입구 거북상에도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사람들로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문묘 내 서예실은 이미 학부모들로 북적거렸다. 두루마리 위에 직접 소망 글귀를 쓸 수도, 원하는 문구 작성을 담당자에게 부탁할 수도 있는 장소다. 문묘 관계자는 “시험 직전에는 주로 학생들이 왔는데, 오늘 같은 시험 당일 방문자는 대부분 학부모나 수험생의 일가친척”이라며 “가장 많이 써 달라는 문구는 ‘합격’과 ‘등과’’라고 귀띔했다.
이튿날인 29일 오후 3시 30분, 학생들이 마지막 시험을 마치고 교문을 빠져나왔다. 12년간의 학업 압박에서 벗어난 학생들은 대부분 활짝 웃었고, 더러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하노이 암스테르담고 앞에서 만난 까오반후이(18)는 “몇 년 동안 새벽 5시부터 밤 10시까지 학교와 학원을 오갔다. 18일 결과가 나올 때까진 푹 자고 싶다”고 했다.
날로 교묘해지는 부정행위
베트남 교육열이 높은 건 유교 문화 탓인지 입신양명을 출세의 지름길로 보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많다. 과거제도가 처음 도입된 1075년부터 1919년까지, 80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시험 통과=가문을 일으키는 수단’이라는 관념이 퍼져 있었다. 지금까지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높은 급여를 보장받는 직장에 들어간다”는 인식은 여전하다.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부정행위 이슈도 해마다 반복된다. 베트남 공안은 올해 시험을 2주 앞두고 다수의 학생과 학부모가 쌀알 크기 정도인 첨단 장비를 구입한 사실을 파악했다. 르민만 사이버보안 수사부 부국장은 “초소형 녹음기, 소형 카메라 등을 사들인 정황을 포착해 수사 중”이라며 “매년 부정행위가 적발되는데 수법도 나날이 진화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실제 1일 차에는 시험 도중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시험지가 찍힌 사진이 유포돼 교육 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때로는 대규모 ‘입시 스캔들’까지 발생한다. 2018년 주요 지방성 고위 공무원과 교육청 간부가 대거 연루된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교육 당국 관계자가 2~4억 동(약 1,000~2,000만 원)을 받고 고위 공직자 자녀와 친인척 114명의 성적을 조작한 사실이 밝혀져 파문이 일었다. 이듬해에도 고위직 자녀를 포함해 108명의 학생 성적이 조작되면서 이들이 입학한 베트남 명문대가 조사에 나서기도 했다.
하노이=글·사진 허경주 특파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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