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장들도 "뭘 어떻게 해야 하나"… 대학엔 너무 버거운 '자율'?

김경준 2023. 7. 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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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밖 수업 확대 등 두고 혼란 속 설왕설래
"규제 완화 환영하지만 가이드라인은 있어야"
교수들은 "자율전공 확대 땐 기초학문 고사"
"새 전공 개발하라" 벌써부터 압박 기류도
이주호(오른쪽)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지난달 29일 부산 해운대구 파라다이스호텔에서 열린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하계 대학 총장 세미나에 참석하고 있다. 왼쪽은 장제국 대교협 회장(동서대 총장). 부산=연합뉴스

정부의 대학 자율화 정책이 관련 시행령 개정으로 현실화하자 대학가에서는 기대 한편으로 혼란이 감지되고 있다. 묵은 규제들이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한꺼번에 완화되자, 대학 운영 최고책임자인 총장부터 일선 교수들까지 기회를 어떻게 살려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분위기다. 규제 완화는 경쟁 강화로 이어지는 터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대학이나 전공생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초학문 및 비인기학과는 결국 고사할 거라는 위기감도 높아지고 있다.


조직 구성·교원 역할·정원 조정까지 알아서 하라고?

장제국 한국대학교육협의회장(동서대 총장)은 5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생각보다 훨씬 큰 폭으로 규제가 풀렸다"며 "규제 개혁은 바람직하지만 갑자기 풀리다 보니 어리둥절한 총장들이 많은 게 사실"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교육부가 지난달 26일 확정해 입법 예고한 고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안에 대한 반응으로, 개정안에는 △학과·학부 조직 원칙 폐지 △교수의 주 9시간 강의 원칙 폐지 △학교 밖 수업 확대 등 규제 철폐 방안이 대거 포함됐다.

또 다른 대학 총장도 "대학 조직, 수업 방식, 교원 역할, 정원 조정까지 갑자기 학교에서 다 알아서 하라고 하니 당황스럽다"며 "정부가 가이드라인 정도는 제시하면서 점진적으로 규제를 완화해야 혼란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 총장들을 당혹게 하는 변화 중 하나가 개정 시행령에서 학교 밖 수업의 새로운 유형으로 신설된 '협동수업'이다. 시행령이 이대로 공포되면 산업체와 연구기관에서 졸업학점의 4분의 1까지 수업을 진행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학교 밖 수업은 그간 대학들이 교외 편법 학습장 운영 우려가 커서 원칙적으로 금지해왔던 터라, 부작용 방지 대책 없는 시행에 우려가 적지 않다. 또 지역별 산업 여건이 다른 상황에서 협동수업 지역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대학 간 격차가 더 벌어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장 회장은 "다른 도시에서 수업을 받아도 되는 건지, 어느 수준까지 허용되는 건지, 총장들이 구체적 내용을 몰라 설왕설래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등록금 기대지 말라는데 돈 벌 방법이 없어"

대학 유휴부지에 상업시설 설치를 허용하는 방안을 두고도 혼란상이 감지된다. 교육부는 지난 3월 대학이 등록금 외에도 수익을 다각화하도록 교육용 토지·건물 용도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국토교통부령 개정을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대학 유휴부지의 상당 부분이 녹지 지역이라 개발이 어렵고 용도 변경도 여의치 않다 보니, 교육부·국토부 협의로만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대학이 돈을 벌 수 있게 규제를 풀어준다지만 실제로는 돈 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불만이 나오는 이유다.

이런 하소연은 지난달 29일 부산에서 열린 대교협 하계 총장 세미나에서도 이어졌다. 한 지방 사립대 총장은 행사에 참석한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에게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들은 수익사업으로 연간 10조 원 이상을 번다"며 "우리도 정말로 돈이 되는 사업을 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전공 선택 확대+수업 시수 자율=기초학문 고사"

교수 사회는 개정 시행령 내용 가운데 '학과·학부 칸막이 제거' '교수 강의시간 자율화'에 불안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학생들의 전공 선택권 확대를 명분으로 자율전공 모집이 보편화하면 인기학과와 비인기학과의 격차가 현격하게 벌어져 기초학문 피폐화, 교수 채용 감축, 나아가 대학 교육의 질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려가 현실화할 조짐도 벌써부터 보인다. 일부 수도권 소재 사립대는 최근 교무회의에서 교수가 폐강 등으로 주당 9시간 수업을 채우지 못하면 나머지 시수를 수강생이 많은 시간강사에게 배정하고 해당 교수의 급여를 깎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교수들에게는 기존 전공 외에 새로운 과목을 개발하라는 지시도 내려졌다. 융합전공에 대응하라는 명분이지만 교수들 사이에선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는 푸념이 나온다.

임은희 대학교육연구소 연구원은 "대학들이 자율 운영을 구실로 안 그래도 위기를 겪고 있는 기초학문 분야에 투자를 더욱 줄일 것"이라며 "정부 차원에서 재정 지원이나 육성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사립대학교수회연합회는 "주 9시간 교수(강의) 원칙 삭제로 대학들이 비용을 줄이려 기존 교수들의 수업 시수를 늘리고 신임 교수 채용을 줄일 게 뻔하다"며 "교육의 질은 낮아지고 피해는 학생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비판했다.

수업 시수 조정은 교수 연구 역량 강화를 위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있다. 수도권 소재 대학의 공대 교수 A씨는 "미국은 연구 의지가 있는 젊은 교수의 수업 부담을 덜어주고, 연구를 안 하는 교수가 더 많은 수업을 소화하는 게 일반적"이라며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새로운 학문 육성은 피할 수 없는 과제라 교수들이 더 노력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김경준 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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