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판 ‘임대차 3법’ 3년… 월세 씨가 마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서유근 특파원 2023. 7. 6. 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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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근의 지구 반대편]
집주인이 거둬들인 임대 13만채
‘돈 크라이 포 아파트’ -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아르헨티나에서는 3년 전 개정 시행된 ‘임대차법’으로 인해 월세 물량이 자취를 감췄다. 지난달 월세 상승률(전년 대비 145%)이 물가 상승률(120%)을 넘어서면서 여파가 이어졌다. 사진은 지난 5월 18일(현지 시각)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정부의 경제 정책에 반대하고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는 모습. 건물 외벽의 대형 얼굴 그림은 ‘에비타’로 더 잘 알려진 에바 페론(1919~1952) 전 대통령 부인이다. /AP 연합뉴스

4일(현지 시각)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부동산 중개소. ‘월세 아파트가 있느냐’고 묻자, 중개인 호세 마리아노는 곧바로 “없다”고 했다. 그는 “3년 전 임대차법 개정 후 집주인들이 임대 물건을 싹 거둬들였다”며 “다른 부동산에 가도 상황이 비슷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실제 기자가 이날 아파트가 밀집한 레콜레타와 팔레르모 치코 일대 부동산 5곳을 돌아본 결과, 매매 물량은 100개가 넘는 반면 장기 월세 가능 물건은 단 1개에 불과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2020년 7월부터 여야 합의로 임대차법이 개정 시행됐다. 이후 현재까지 월세 매물이 자취를 감추고 가격이 폭등하는 ‘대란’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개정법 시행 후 첫 계약한 월세의 만기(3년)가 이달에 첫 도래하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만 세입자 수천명이 계약 갱신에 실패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아르헨티나의 개정 임대차법은 ‘예측 가능성을 높여 세입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구체적으로 월세 계약 보장 기간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고, 계약 기간 내 월세를 인상할 수 있는 단위 기간을 반기(6개월)에서 1년으로 변경하고, 월세 인상률을 소비자 물가와 정규직 보수를 참고해 중앙은행이 발표하는 임대계약지수(ICL)에 비례하도록 제한했다. 한국에서 전·월세를 한 차례 연장해 4년까지 입주 가능토록 하고, 임대료 인상률을 5%로 제한해 2020년 6월부터 시행한 ‘임대차 3법’과 유사하다.

그래픽=정인성

아르헨티나에서도 “법 시행 당시 입주 중인 이들은 일시적으로 주거 안정이 높아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하지만 집주인들에겐 정반대였다. 집주인들은 월세 매물을 대거 거둬들인 대신 ‘에어비앤비’를 비롯해 3개월 이내의 단기 임대로 눈을 돌렸다. 집주인 입장에서 평균 289달러(37만원)의 장기 월세 수익을 포기하더라도 월 평균 656달러(85만원)의 단기 임대 수익을 좇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 모니터링 업체 인베르티레에 따르면, 현재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총 1만6199개의 단기 임대 아파트가 있으며 이는 작년 대비 65% 늘어난 수치다. 반면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시주택연구원(IVC)에 따르면, 법 시행 전 이 도시의 월세 물건은 월 평균 6000개에 달했지만 현재는 1000개도 안 된다.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집주인이 시장에 내놓지 않고 있는 임대용 주택만 13만채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연간 물가 상승률이 100%가 넘는 초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아르헨티나에서 월세 계약이 장기간 묶이게 되자 집주인들의 불안감이 폭발했다는 분석이다.

개정법은 계약 기간 중 임대료 상승률을 제한했지만, 신규 계약 월세는 폭등했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과 부동산 정보 업체 소나프롭(Zonaprop)에 따르면, 법이 시행된 2020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전용 면적 50㎡ 아파트 월세 상승률은 전년 대비 62%로, 물가 상승률(36%)보다 훨씬 높았다. 지난달에도 신규 계약의 월세 상승률이 145%(전년 대비)로 물가 상승률(120%)을 상회했다. 집주인들이 장기 계약에 따라 미리 가격을 더 올려받게 되면서 월세 상승이 가속화한 것이다.

아르헨티나 상공에서 바라본 부에노스아이레스. /서유근 특파원

게다가 빠르면 이달부터 3년 만기 후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세입자들의 발등엔 불이 떨어졌다. 한 40대 세입자는 “이제 월급 8만 페소(21만원) 중 6만 페소(15만원)를 월세로 내고 나머지로 생활하게 생겼다”고 했다. 현지 매체 라나시온은 “월세방 품귀를 경험한 세입자들이 물건을 보지도 않고 계약부터 하고 있다”며 “도심에서 외곽으로 이사하고 면적을 줄이며 ‘공유 아파트’에 입주하는 등의 사례가 크게 늘었다”고 했다. 라나시온은 “세입자와 집주인 모두에게 해를 끼친 임대차법”이라고 했다.

아르헨티나 정부와 의회에서도 개정 임대차법의 실패를 인정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법 재개정은 지지부진하다. 페로니스트(대중영합주의자)가 주도하는 여권에서는 “입주 3년 보장을 유지하고, 대신 임대인에게 세제 혜택을 주자”고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야권에선 “세제 혜택이 인플레이션을 더 부추길 수 있다”며 “입주 보장 기간을 2년으로 복구시키자”고 맞서고 있다.

4일(현지 시각)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팔레르모의 한 아파트에 아르헨티나 국기가 걸려 있다. /서유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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