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文 정부 적폐 청산이 관료 사회에 남긴 후유증
공무원이 동료를 검찰에 고발
“열심히 일하면 손해”라는
복지부동 풍조만 강화시켜
지난 6월 초 기획재정부가 출입 기자들에게 이메일로 배포한 보도 해명자료가 관가(官街)에서 화제가 됐다. ‘연금소득에 대한 저율 분리과세 기준금액 확대 여부는 결정된 바 없다’는 내용 자체는 별게 없었지만, 첨부파일명이 ‘연금소득 저율 분리과세 확대 관련(실수)’이라고 돼있었기 때문이다.
“실수가 무슨 뜻이지”라고 출입 기자들이 궁금해하고 있을 때 기재부는 (실수)를 (배포용)으로 바꾼 수정본을 다시 배포했다.
‘실수’는 공무원들이 쓰는 줄인 말로, ‘실장 지시로 수정한’이란 뜻이다. 마찬가지로 ‘차수’ ‘국수’ ‘과수’는 차관, 국장, 과장이 수정을 지시했다는 의미다. 국수1, 국수2처럼 숫자가 뒤에 붙는 것은 수정하라고 한 횟수를 가리킨다. 다른 정부 부처들에서도 이런 파일명이 널리 쓰인다고 한다.
이 해프닝을 퇴직한 전직 관료들에게 얘기했더니 모두 놀랍다는 반응과 함께 혀를 끌끌 찼다. 본인들이 현역일 때는 실무자가 작성한 초고가 상급자 지시로 내용이 바뀔 경우 날짜로 파일명을 구분했다고 한다. 한 전직 관료는 “나중에 정책이 잘못됐을 경우 감사원 감사나 검찰 수사를 받을 때 실무자가 본인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문건 수정 주체를 파일명으로 표시하는 것”이라며 “공무원들이 대한민국 정책을 본인이 주도했다는 자부심보다 책임 추궁을 두려워하는 면피와 보신주의에 빠진 것”이라고 했다.
이런 관행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관가에 뿌리내린 것은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 때문이라는 의견이 많다.
‘적폐의 철저하고 완전한 청산’은 문 정부의 100대 국정 과제 중 1호였다. 당시 각 정부 부처가 청와대 지시에 따라 적폐 청산을 위한 TFT를 구성했고, 전 정권 때 속칭 ‘잘나갔던’ 공무원들에 대한 인사 보복에 나섰다. 교육부의 경우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담당했던 공무원들을 무더기로 검찰에 수사 의뢰했다. 같은 직장 공무원끼리 다른 동료를 고발한 것을 두고 ‘동족상잔’이나 ‘패륜’ 같은 험한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한 국장급 공무원은 “정권 교체 후 동료들이 곤욕을 치르는 것을 목격한 공무원들 사이에 ‘적극적으로 일하면 오히려 처벌받을 수 있다’는 복지부동(伏地不動)이 확산됐다”고 했다.
전 정권에 ‘부역’했던 공무원들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주는 작업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돼온 것으로, 새 정부의 국정 철학을 전파하고 공직 사회의 기강을 잡기 위해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불법 행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전 정권의 정책을 수행했다는 이유로 형사처벌로 몰고가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문 정부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고 비판받는 이유다.
윤석열 정부도 공무원 사회의 복지부동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는 것 같다. 윤 대통령은 최근 국정 철학을 잘 이해하는 대통령실 비서관들을 대거 각 부처 차관으로 임명하면서 새 정부 정책 이행에 소극적인 공무원을 인사 조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인사 불이익이라는 채찍질만으로 위축될 대로 위축된 공무원 조직을 변화시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10년 만에 좌파에서 우파로의 정권 교체에 성공했던 MB 정부에서 첫 기재부 장관을 맡은 강만수 전 장관의 사례가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의 정책으로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하는 직원들에게 “공무원의 신분을 보장하는 헌법의 취지는 국민들이 뽑은 정권에 충성하라는 것”이라며 “여러분들의 과거를 묻지 않을 테니 새로 출범한 정부의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달라”고 했다. 공무원들이 인사 보복에 대한 두려움 없이 업무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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