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나를 만나, 그리고 나를 써
“이 과제도, 이 수업도 여러분 인생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진실하게 대면하는 일, 그것만큼은 여러분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라고 확신한다. 치열하게 나를 들여다보고, 진짜 나를 가감 없이 써라. 나를 쏟아내 보는 일은 액체 상태로 토해진 형편없는 몰골의 나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자기 서사 쓰기 과제를 내주며, 내가 학생들에게 하는 말이다. 이 말을 영화 <더 웨일>에서 만났다. 대학에서 작문을 가르치는 찰리는 수업 시간마다 내가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을 한다. 제발 솔직하게 쓰라고. 그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이상한 점은 나와 같은 위치에서 내가 하던 말을 되풀이하는 누군가를 보고 역시 나만 진솔한 글쓰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든 게 아니라, 그것이 정말 학생들에게 중요한 일일까 하는 불안이 움텄다는 점이다. 그는 분명 진정성 있게 호소하고 있다. 그런데도 진솔하게 쓰라는 그 간곡한 요청이 학생들이 아닌, 그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가 궁극적으로 구원하고 싶은 사람은 자기인 듯 보였고, 슬피 우는 그의 얼굴에 드리운 짙은 자기 연민이 그의 말을 전부 긍정할 수만은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했던 당부를 곱씹어 보았다. 나는 학생들을 위해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비평가로서 단순히 좋은 글을 읽고 싶었던 것일까. 그도 아니면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학생의 성장을 목도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런 요구는 자기 회한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2020년쯤, 불행한 일을 연달아 겪으며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나서야 자기 돌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됐다. 자기를 제대로 파악하고 수용해 주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비교적 늦게 배운 셈이다. 나는 끊임없이 자기를 착취하면서도 그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에는 대체로 무관심했다. 성과사회에 걸맞은 유능한 일꾼이라고 자부해 왔지만, 실상은 그저 자기를 잘 부릴 줄 아는 냉담하고 악독한 고용주였던 것이다. 나를 성심껏 살피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글을 잔뜩 쓰고 난 후에야 자기를 조금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자기에 관해 쓰려면, 자신을 찬찬히 뜯어보고 탐구하는 시간, 그 자기를 직면하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시간, 그리고 이를 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무한경쟁의 굴레에서 잠시 이탈하여 그 느릿한 호흡을 견뎌야 한다. 게다가 애써 외면해 온 자신의 치부까지 맞닥뜨려야 하기에, 이는 매우 고통스러운 작업이 된다.
그러나 고통 없이는 무엇도 제대로 사랑할 수 없다. 자신의 상처와 뒤틀림, 지긋지긋한 습관과 모난 마음들, 그 모든 것을 문장으로 옮기며 나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그리하여 나를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종내에는 내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길, 진심으로 바란다. 좋은 선배이자 선생이 되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심에, 학생들이 진정으로 자기를 마주하는 순간을 엿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찌 보면 내 욕망을 투사한 것이겠다. 그렇지만 그 이기심은 이타심이기도 하다. 다른 이들은 나보다 좀 더 빨리, 스스로를 돌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니까. 나를 미뤄두고, 나에게서 소외된 채 살아가는, 그래서 나의 일과 생활이 저만치 나를 앞질러 가는 삶은 너무 고달프지 않은가.
이런 글을 쓰면서도, 나는 여전히 숨 쉬듯 나를 미워한다. 일에 치일 때면, 나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쳐 둔다. 그렇지만 다시 꾸역꾸역 그 못난 마음을 고쳐 쓰며 사랑해 본다. 이 험난한 사회를 살아내야 하는 우리가 자기를 견디는 말랑하고도 단단한 마음을 가질 수 있기를,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지닌 아름다운 언어로 정성껏 돌볼 수 있기를 바란다.
성현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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