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안녕? 자두야!
‘아…기영아’. 주간경향 1522호는 ‘검정 고무신’과 함께 표지 이야기를 싣고 있다. 궁금한 마음에 단박에 읽어 내려갔다. 웬걸. 말 줄임표에는 온갖 착잡한 스토리가 담겨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렸을 적에 신으셨던 추억의 검정 고무신/엄마 아빠도 어릴 적 신던 헐렁하고 못생긴 검정 고무신/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웃지 못할 이야기, 정다운 얘기, 검정 고무신/미워도 했고 사랑도 했고 원망도 했지만 워 워 워/지난 시절 다시는 오지 않아도 모두 다 아름답고 정다운 얘기/꿈같은 얘기 검정 고무신, 검정 고무신.” 애니메이션 ‘검정 고무신’을 여는 노래다.
고무신은 순조가 처음으로 신고 그 편리함을 백성들에게 알림으로써 대중화에 이바지했다고 한다. 그 이후 값싸고 질긴 고무의 성질 때문에 백성도 애용했다고 한다. 그러니 민중의 애환이 서려 있는 생활용품으로서 고무신은 시대의 상징물이기도 했다. 특히 검정 고무신은 원재료가 가진 색상이 탈색제를 따로 넣을 필요가 없었으니 널리 대중이 사서 신기에 값싼 제품이었으리라.
디즈니, 일본 그리고 어쩌다 보게 된 국산 애니메이션은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는 소통 거리였다. ‘뽀로로’가 기억되는 유일한 국산 애니메이션이었으며, ‘검정 고무신’은 아이들과 소통 여부와는 관계없이 내가 즐겨보던 애니메이션이었다. ‘검정 고무신’의 여는 노래처럼 나의 추억과 아픔, 고통 등을 아름답게 그렸기 때문이다. ‘검정 고무신’은 서울의 1960년대의 삶을 그리고 있다. 먹기 희귀한 바나나, 슈크림 빵 그리고 라면(극 중에서는 10원, 내가 처음 맛보았을 때는 20원이었다). 그래도 극 중에서 어쩌다 만나는 부잣집 아이는 한둘에 불과하고, 인물 대부분은 그저 그만그만한 가난한 아이들이었다. 절대적 빈곤이 세상에 만연하던 시절이어서 정겹고, 너의 가난과 아픔은 오롯이 서로가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지난 3월 13일 작가 이우영은 유명을 달리했다. 우선 만화계의 관행이라 할 수 있는 ‘매절 계약’과 관련이 있다. 즉 ‘출판사가 저자에게 일정 금액을 지급하면, 그 저작물을 이용해 얻은 추가 수익을 독점하는 계약 형태를 지칭한다’. 문제는 ‘검정 고무신’ 4기 애니메이션 제작이 형설출판사 산하 형설엔이 주도하게 되었고, 각종 상품화를 추진하는 과정마다 원저작자의 동의가 있어야 하느냐는 대립이다. 형설 측은 “2차 저작물인 애니메이션으로 파생된 제품을 계약하는 권리는 애니메이션 투자사의 권리”라는 입장이다. 이우영·이우진 그림 작가와 이영일 글 작가 그리고 형설출판사 장모 대표가 각각 27%, 10%, 27%, 36%씩 지분을 나눠 갖고 있다. 장 대표에게 사업 권한이 있는 만큼 불씨는 언제든 다시 타오를 수 있고, 사업권 설정계약에 서명한 당사자가 이우영 작가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즘 웹툰 시장이 활황이다. 그러나 계약 관행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웹툰 계약의 기본 형태는 MG(Minimum Guarantee)제다. 우선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작가에게 선수금을 주고 향후 작품의 성공 여부에 따라 RS(Revenue Share)라고 하는 수익배분을 추가로 받을 수 있다. 즉 수입이 창출되면 회사와 작가가 계약 비율대로 나누고 작가는 MG로 지급받은 돈부터 출판사에 갚는 방식이다. 하루 평균 9.9시간, 마감 전날 평균 11.8시간, 주 5.7일 근무. 노동 자율성이 없다고 느끼는 비율 63.78%에 직면한 작가들의 현실이다.
애니메이션(animation)의 어원은 라틴어‘animare’. give breath to, to endow with a particular spirit, to give courage to 등의 의미를 갖는 동사에서 비롯되었다. 즉 ‘숨을 불어 넣다, 특정한 영혼을 부여하다, 용기를 불어넣다’ 등 뜻이 있다. 이럴진대 ‘공정무역’을 주장하는 마당에 창작자에게 ‘공정계약’을 마다하는 만화계에 일침을 가하고 싶다.
나는 중3 딸과 종종 ‘안녕, 자두야’를 보고 있다. 자두를 통해 그려지는 현실은 절대적 가난에서는 해방되었다 할지라도, ‘상대적 박탈감(sense of relative deprivation)’은 더욱 짙어감을 떨칠 수가 없다. 물론 만화가 그리지 않는 절대적 빈곤은 뉴스의 한쪽 편을 차지하는 정도의 일시적 동정 거리로 취급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안녕? 자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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