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휘의 시네필] 서구 허상 까발린 도발적 ‘포즈’…극단적 현학과 냉소의 공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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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의 선택이 항상 옳은 건 아니다.
자비에 돌란에게 과분한 상을 안기며 그들의 총아로 밀어줄 때도 그렇고, 칸 영화제의 선택에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순간이 있다.
민감한 사회적 이슈를 종합선물세트 삼아 정치적 메시지를 노골화하는 이 한 편의 블랙코미디 풍자극은 최소한 요 몇 년간 칸 영화제의 성향에 더없이 어울리는 모양새를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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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의 선택이 항상 옳은 건 아니다. 작품성이 중요하다지만 심사위원진의 성향과 정치적 상황 등, 수상작 선정에는 여러 변수가 작용하곤 한다. 때문에 뒷날 걸작 반열에 오른 영화가 당시엔 무관(無冠)에 그치거나 엉뚱한 영화에 밀려나는 반면, 정작 그랑프리를 차지한 영화는 시간이 지나 평가가 달라지며 잊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올드보이’(2003)가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그해, 황금종려상을 차지한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2004)이 과하게 시사 이슈를 의식했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는 것처럼. 얄궂게도 역사는 반복된다.
자비에 돌란에게 과분한 상을 안기며 그들의 총아로 밀어줄 때도 그렇고, 칸 영화제의 선택에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순간이 있다. 루벤 외스틀룬드의 ‘슬픔의 삼각형’(2022)이 엇갈린 반응 속에서도 ‘헤어질 결심’(2022)과 ‘클로즈’(2022)를 밀어내고 황금종려상을 받은 2022년도 그러하다. 그보다 전에 쥘리아 뒤쿠르노의 ‘티탄’(2021)이 혹평 세례를 맞고도 기어이 상을 타 갔던 것처럼, 근래의 칸 영화제는 작품의 내적 만듦새와 예술적 격조보다는 과도한 표현 수위와 급진성에 치중해, 논란을 일으키며 이슈몰이하기 적합한 센세이셔널한 작품들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물론 ‘슬픔의 삼각형’을 내세운 선택을 이해할 구석이 아주 없진 않다. 모델 커플인 칼과 야야의 다툼을 그리는 1장은 남녀 구도의 통념이 역전된 성적 대상화와 평등의 문제를, 호화 유람선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디너파티가 분뇨와 토사물이 넘쳐흐르는 난장판으로 뒤집히는 2장은 사회계급 구별과 허위의식에 찬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냉소를, 무인도에 표류한 생존자들의 계급적 위상이 역전되는 3장은 서방 세계의 하층민으로 살아가는 난민의 처지와 더불어 자본주의 질서가 붕괴된 이후에 대한 상상적 전망을 드러내 보인다.
민감한 사회적 이슈를 종합선물세트 삼아 정치적 메시지를 노골화하는 이 한 편의 블랙코미디 풍자극은 최소한 요 몇 년간 칸 영화제의 성향에 더없이 어울리는 모양새를 한 셈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기생충’(2019)처럼 한 시대의 지형과 구조적 모순을 날카롭게 해부해 내보이는 득의의 사회파 걸작인가? 안타깝게도 그래 보이진 않는다. 멀리는 윌리엄 호가스의 풍자화나 제임스 배리의 희곡 ‘훌륭한 크라이턴’, 가까이는 루이스 부뉴엘의 ‘비리디아나’(1961)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1972)에 닿은 이 영화에는 서구문명의 껍데기를 탈은폐하겠다는 과시적이고 도발적인 ‘포즈’는 있지만, 이 포즈를 뒷받침하고 담론의 발화로까지 이끌어야 할 내적 ’논리’가 결여되어 있다.
‘더 스퀘어’(2017)에서 감독은 소수자를 작품 소재로 삼는 현대미술의 계몽과 난민을 거부하는 태도의 실제 사이에 놓인 괴리를 응시하며, 연민이든 배제든 결국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에 의한 소외라는 일리(一理)로 일목요연하게 엮어낸 바 있다. 반면 ‘슬픔의 삼각형’은 자극적 표현의 극단화를 통해 현학과 냉소의 포즈를 전시하는 데 급급할 뿐, 현상의 심층을 들여다보았던 전작의 심도는 사라지고 없다. 많은 것을 포괄해 다루고 싶었던 욕망은 있었으나, 그것이 이른 귀결은 프로파간다의 공허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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