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퇴폐적인 것’들의 반란… 이제 세계로 뻗는 한국 실험미술
백발의 노(老)작가가 15m 길이 검은 고무판에 올라섰다. 그를 에워싼 관객들이 숨을 죽이며 지켜본다. 맨발로 쪼그려앉은 그는 흰색 분필을 쥔 채 좌우로 선을 그으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팔이 선을 그으면, 뒤따르는 발이 그 선을 지웠다.
지난달 28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한국의 1세대 전위미술가 이건용(81) 작가가 ‘달팽이 걸음’을 선보였다. 1979년 브라질 상파울루 국제비엔날레에서 기립박수를 받은 그의 전매특허 퍼포먼스다. 어느덧 노작가가 된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중간중간 일어섰고, 그때마다 관객들은 “힘내세요!”라고 외치며 박수를 보냈다. 달팽이처럼 느리지만 꾸준히 전진한 그의 뒤로, 두 줄 발자국이 선명히 남았다. 작가는 “그리는 것과 지우는 것을 반복해서 완성하는 이 행위는 회화의 본질과 닮았다”고 했다.
이날 퍼포먼스는 국립현대미술관이 미국 구겐하임미술관과 공동기획한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과 연계해 열렸다. 현장 관객 320명, 온라인 라이브 관객 300명이 실시간 응원했고, 22만명이 인스타그램 다시보기로 영상을 봤다. 그가 퍼포먼스를 구상한 당시만 해도 ‘불온하고 퇴폐적인 것’으로 내몰리며 억압받았던 실험미술이 이제 국내뿐 아니라 세계 미술계에서 당당히 인정받게 된 현실을 보여준다. 미술관 측은 “누가 뭐라 하건 느려도 꾸준하게 걸어온 작가의 평생 궤적과 작품 세계를 연상케 한다”고 했다.
전시는 급속한 산업화가 이뤄지던 시기에 국가 권력 통제에 항거하고, 제도권 미술에 반발했던 ‘청년’들의 전위적 실험미술을 보여준다. 김구림, 성능경, 이강소, 이건용, 이승택 등 29명의 대표작 95점과 아카이브 31점을 소개한다. 불태우고, 삭발하고, 언론 탄압에 항거해 신문지를 오리는 행위로 “미친놈” 소리를 들었던 이들은, 이제 세계 미술계 러브콜을 받는 거장이 됐다. 1968년 음악감상실 쎄시봉에서 벌어진 퍼포먼스 ‘투명풍선과 누드’는 당시 “기이하고 미친 짓”이란 비판을 받았으나, 여성이 주체로 등장하는 한국 최초의 페미니즘 프로젝트로 남았다.
서울 전시는 16일까지. 9월 1일부터는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내년 2월 11일부터는 로스앤젤레스 해머미술관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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