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희령의 이야기의 발견] 달팽이의 순간 이동
산길을 벗어나, 아무개는 숲속으로 들어섰다. 볕은 뜨거운데 공기는 축 처진 물주머니 같은 날이었다. 지구가 위험할 정도로 뜨거워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지만, 무더위가 시작되기에는 아직 일렀다. 적어도 장마는 끝나야 하지 않나. 몸이 기억하는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는 시절이다.
바람 한 줄기가 간절했다. 아무개는 등허리를 곧게 펴고 기지개를 켰다. 잠시 그대로 서 있으니 나뭇가지처럼 뻗은 양팔 사이로 바람이 휙 지나가는 듯했다.
나무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무개는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흉내를 내면 닮기라도 하겠지. 몇 달 전에 부러져 여전히 보호대를 차고 있는 오른쪽 손목이 근질근질했다. 조금 전에 지나쳐 온 아파트 단지 안에는 버드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몸통과 굵은 가지들이 뭉텅뭉텅 잘려 나간 모습을 목격한 게 봄이었다. 얼마 안 있어 아무개는 의자 위에 올라가려다가 넘어지며 손목을 다쳤다. 동티가 난 게야. 오며 가며 버드나무 앞에서는 공손해지려 애썼다.
나무의 잘린 부위에는 이제 이파리와 나뭇가지가 무성하게 돋아나 있어, 마치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얼굴을 가린 ‘수줍은 초록 인간’1)처럼 보였다. 이러고 있으면 근질거리는 손목에도 행여 반짝이는 초록들이 수두룩 돋아날지 몰라. 아무개는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새가 날아오는 게 중요해. 나무라면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새떼를 품기 마련이다. 새들의 날갯짓이 바람을 불러오지. 아무개는 하늘을 향해 팔을 뻗은 채 손가락을 까딱여 보았다. 고요했다. 움직이는 건 새를 흉내 내는 손밖에 없었다.
아무개는 만화 속에서 본 딱따구리를 떠올렸다. 망치로 사람을 쾅쾅 때리고 함부로 웃어젖혔다. 설마 걔가 오지는 않겠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손바닥에 고인 빗물이 팔목을 따라 흘러내렸다. 아무개는 팔을 내려 겨드랑이를 긁고 싶었다.
어디선가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급진적이고 용감한 행위일 때가 있어.”2) 아무개는 위아래 앞뒤 양옆으로 고개를 돌려 누가 말하고 있는지 찾아보았다. “새들은 오래된 숲으로 날아가. 나무가 죽어서 제자리에 쓰러지는 숲 말이야. 온갖 벌레가 죽은 나무를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는 곳. 새는 먹을 게 많은 곳에 둥지를 틀고, 크고 튼튼한 알을 낳지.” 금빛으로 빛나는 작은 달팽이였다.
“언제 겨드랑이까지 올라온 거야? 달팽이는 순간이동을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강을 건너기 전에 분자 아니 소립자 아니 뭐 그런 걸로 분해되었다가, 강을 건넌 다음에 다시 합체한다며? 정말이야?”
아무개는 언젠가 인터넷에서 검색하다가 읽은 ‘지식’을 떠올렸다. “인간은 알아야 할 것을 모르고 알 필요 없는 것을 아는 척하지. 아는 것 속에 두려워할 것이 훨씬 많고 모르는 것 속에 희망을 걸 것이 훨씬 많은데 말이야.3) 쓸데없는 호기심을 버리면 달팽이의 경고도 읽을 수 있어. 큰 홍수가 닥치기 전에 달팽이들은 미리 위험을 감지해. 물마루가 닿지 않을 만큼 높은 곳의 나무 몸통에 알을 낳거든. 우리의 계산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어.”4)
“지금 내 몸에 알을 낳으려는 거야?” 아무개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새를 기다렸는데 달팽이가 온 것처럼 나도 나무 흉내를 내는 인간을 나무로 착각했을 뿐이야. 요즘은 모든 게 너무 혼란스럽네. 하지만 일어나는 일을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어. 우리는 숲의 일부이니까.” 아무개는 달팽이가 슬금슬금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나무가 되려면 먼저 숲이 되어야 해. 천천히 함께 숨 쉬면서 오직 필요한 것만 나누는 거지. 그 이상은 절대로 취하지 않아.”
가려움을 참을 수 없어 팔을 내렸으나 달팽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개는 숲에서 걸어나왔다.
1) 2) 3)<지구의 마지막 숲을 걷다>, 밴 롤런스
4)<시간의 목소리>,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부희령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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