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국의 아포리아]미국정치에서 닉슨의 유산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2023. 7. 6.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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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국 교수

[편집자주]아포리아는 그리스어의 부정 접두사 아(α)와 길을 뜻하는 포리아(ποροσ)가 합쳐져 길이 없는 막다른 골목, 또는 증거와 반증이 동시에 존재하여 진실을 규명하기 어려운 난제를 뜻하는 용어. '김남국의 아포리아'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에 대해 지구적 맥락과 역사적 흐름을 고려한 성찰을 통해 새로운 해석과 대안을 모색한다.

미국의 37대 대통령을 지낸 리처드 닉슨의 묘지는 그의 고향인 요바린다의 생가 옆에 있다. 로스앤젤레스 남동쪽 30분 거리에 위치한 요바린다에는 그의 생가와 묘지를 안고 있는 닉슨도서관과 박물관도 자리잡고 있다. 생가와 부부의 묘지, 기념건물들이 함께 있는 풍경을 보면 닉슨이 사후에 생각보다 안온한 복을 누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이것보다 더 흥미로운 점은 닉슨도서관의 다양한 전시물과 홍보영상이 닉슨을 '평화의 중재자'라는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소련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장과 만나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에 서명함으로써 냉전의 변곡점을 만들어냈고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 주석과 만나 미중수교를 이끌어냄으로써 소련 중심의 단일한 공산진영 대오를 흔들었다. 특히 마오 주석과 만나서는 자신의 방중과 관련해 "좌파가 말만 하고 있을 때 우파는 행동한다"고 이야기했고 마오는 "그래서 나는 우파를 좋아한다"고 답했다. 닉슨은 무엇보다 미국 내 반전여론과 베트남전쟁의 피로감을 인정하고 베트남에서 미군 철수를 결정함으로써 종전을 앞당겼다.

1950년대 매카시즘 선풍에 동조한 반공 전사였던 닉슨이 공산권과의 데탕트를 이끌어낸 것이나 1973년 칠레의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피노체트의 군사쿠데타를 지원한 것 등은 미국 외교의 현실주의적이고 모순적인 여러 얼굴을 그대로 보여준다. 아마도 닉슨은 이런 미국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낸 가장 미국적인 대통령일 것이다. 그가 천명한 '닉슨독트린'은 인권이나 정치적 이념이 아닌 미국의 전략적 이해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면서 아시아에서 군사적 개입을 줄이는 베트남전의 베트남화, 한국에서 미 7사단의 철수 등으로 나타났다.

닉슨에 대해 냉전해체를 시도한 평화의 중재자라고 부르는 것이 낯선 이유는 그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을 앞두고 임기 도중 사임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닉슨은 민주당 선거본부 도청사건 은폐를 모의하는 백악관 내부 녹음테이프 제출을 특별검사 아치발트 콕스로부터 요청받자 법무장관 엘리엇 리처드슨에게 그의 해임을 지시했다. 법무장관이 거절하며 사임하자 부장관 윌리엄 루켈샤우스에게 지시했고 그도 거절하며 사임하자 차관보인 로버트 보크에게 지시해서 결국 특별검사 해임을 관철시켰다.

닉슨은 정치의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했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승리를 추구했다. 그는 1972년 재선에서 60.7%의 일반 득표율과 49개주의 선거인단에서 승리하는 압도적 결과를 얻었지만 불법과 부패가 드러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승리는 빛이 바랬다. 그가 1960년대 베트남전 반전운동과 흑인 민권운동 과정에서 소외된 백인노동자들을 '침묵하는 다수'라는 이름으로 투표장에 끌어낸 이른바 '남부전략'(southern strategy)은 오늘날 양극화된 미국 정치의 기원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백인들의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미국의 도시들이 연기와 화염으로 덮여있는 것을 본다"는 그의 선동은 최근 정치상황에서도 낯설지 않은 것이다.

닉슨은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된 해에 미국 부통령으로서 한국을 방문했다. 칼 슈미트의 말처럼 한반도의 상황은 행위로서의 전쟁은 종료됐지만 상태로서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따라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의견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왜곡된 역사의식과 무책임한 국가관을 가진 반국가세력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서로 다른 의견이 공존하는 정치세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반정치적 태도다. 나와 함께 정치공동체를 구성하는 반대자를 적으로 몰아 죽임으로써 정치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은 닉슨의 사례에서 보듯이 궁극적으로 정치의 종언과 정치공동체의 파멸 속에 나의 승리마저 물거품으로 만드는 불행을 가져올 뿐이다.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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