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철기의 개똥法학] 정치의 영역, 사법의 영역
최근 의뢰인들로부터 자신의 사건을 담당하는 재판장의 정치적 성향에 관해 질문받는 일이 늘었다. 막상 들어보면 재판장의 정치적 성향에 의해 결론이 좌우될 가능성은 거의 없는 일반 민형사 사건이 대부분인데도 말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필자는 ‘정치의 사법화’가 주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의 사법화는 원래 선거, 외교안보정책, 국책사업 등 정치공동체의 근본적인 문제를 사법부에 의존해 다루는 경향을 의미한다. 국회에서 통과된 신행정수도 이전 관련 법률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 헌재의 대통령 탄핵심판과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등이 대표적인 정치 사법화의 예로 거론된다. 헌재는 원래 정치적 사법기관이므로 정치적인 사건을 다룰 수밖에 없겠지만 순수한 사법기관으로 법의 해석을 담당하는 법원에도 ‘정치적’인 사건은 너무나 많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 탈북어민 북송 사건, 월성원전 조기 폐쇄 사건, 공수처법 패스트트랙 사건 등 그 자체가 정치적이거나 결론에 따라 정치적 유불리가 갈리는 수많은 사건이 있다. 이제 정치의 사법화는 원래 의미에서 더 나아가 ‘정치적인 사건을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사법부 판단에 맡기는 현상’을 의미하게 됐다.
사법부 불신 키우는 '정치의 사법화'
정치의 사법화는 정치권이 대화와 타협으로 현안을 해결하지 못하고 고소나 고발, 소 제기 등을 통해 해당 문제에 대한 판단을 모두 사법부에 의존하게 된 것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상대를 ‘이겨야 할 경쟁자’가 아니라 ‘죽여야 하는 적’으로 보는 진영주의 정치문화, 검찰의 정치적 수사와 기소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물론 정치적인 사건을 모두 정치적으로만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치적인 이슈가 있는 사건이라도 죄를 지은 사람은 처벌받아야 하고, 억울하게 기소된 사람은 무고함을 밝혀야 한다. 문제는 과도한 정치의 사법화가 필연적으로 사법부에 대한 불신을 야기하고 한정된 사법 자원을 낭비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정치적인 이슈가 있는 사건에서 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리면 그 판단으로 정치적인 이득을 보는 진영에서는 법관의 판단을 칭송하겠지만 반대 진영에서는 법관 개인의 정치적 성향을 함부로 추단해 문제 삼거나 근거 없는 비난을 하기 바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 같은 사건을 배당받은 법관은 어느 한 진영으로부터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판결 후폭풍’을 피하고자 가급적 선고하지 않고 미루거나 선고하더라도 어느 정도 정치적 고려를 하게 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사법부에 대한 일반 국민의 불신을 심화하는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법원에 판단 맡겼다면 승복 문화를
정치적인 사건 처리에 필요 이상의 사법 자원이 낭비되고 있는 것도 큰 문제다. 천안함 침몰 원인을 합동조사단의 발표와 달리 좌초라고 주장했다가 명예훼손으로 기소된 사건은 기소부터 대법원 판결 확정까지 12년이 소요됐고, 공수처법 패스트트랙 사건은 2020년 초에 기소됐는데 아직도 1심이 진행 중이며, 2018년 말 또는 2019년 초에 기소된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 역시 1심이 진행 중이다. 이런 사건은 불복률도 일반 사건에 비해 월등히 높다. 정치적인 사건을 처리하는 데 소요되는 사법 자원 때문에 일반 사건 처리가 지연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특정인의 노력만으로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정치적 문제는 가급적 정치 영역에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차선책으로 사법부 판단에 맡긴 이상 일단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고 이에 승복하는 사회적 합의 내지 관행을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언론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법관은 정치적 이슈가 있는 사건에서도 반드시 누군가의 손을 들어줘야 한다. 사법의 영역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있을 뿐 무승부는 없다. 심판 판정에 불만이 있더라도 필드 안에서의 판정은 존중돼야 한다. 대화와 타협, 설득과 양보는 정치의 영역이지 사법의 영역이 아니다. 필드 밖의 다른 무엇이 개입하는 순간, 사법부에 대한 신뢰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민철기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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