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고대영 비서실장' 박장범 KBS 앵커 클로징이 가린 것
밝히지 않은 '고대영 사장 비서실장' 이력
법원도 책임 인정한 고대영의 방송법 위반 인사 남발
동료 기자에 대한 부당 인사 적극 옹호했던 그의 전력
"기자사회 억압하는데 앞장 섰던 수뇌부들" 비판 나와
[미디어오늘 김도연 기자]
“공영방송 사장을 불법 해임한 이명박 전 대통령, 그리고 불법 해임에 관련됐던 여러 사람들, 일제히 침묵하고 있다. 대법원 판결을 겸허히 수용하고 반성한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는 항의 표시인지 침묵의 커튼 뒤에 숨은 이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만약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2년 2월 KBS 앵커가 자사 프로그램에서 2008년 8월 정연주 전 KBS 사장을 불법 해임한 이명박 대통령을 이처럼 비판했다가 다시보기 방송이 차단됐다면, 진보·개혁 진영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 앵커 입을 지운 KBS 조치를 매섭게 비판했을 것이다. 2009년 이명박 정부 '쓴소리' 클로징으로 유명했던 신경민 앵커를 하차시킨 MBC 경영진을 비판했던 것처럼.
지난 2일 오전 KBS 1TV '일요진단 라이브'에서 박장범 KBS 앵커는 2018년 1월 고대영 전 KBS 사장을 해임한 문재인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클로징을 남겼다. 그의 클로징은 앞서 서술한 문장에서 '이명박'을 '문재인'으로만 바꾸면 된다.
“지난주 대법원은 문재인 정부 시절 고대영 전 KBS 사장 해임은 불법이라는 판결을 확정했다. 공영방송 사장을 불법 해임한 문재인 전 대통령, 그리고 불법 해임에 관련됐던 여러 사람들, 일제히 침묵하고 있다. 대법원 판결을 겸허히 수용하고 반성한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는 항의 표시인지 침묵의 커튼 뒤에 숨은 이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KBS는 2일 오후 KBS 방송 관련 규정에 따라 홈페이지와 유튜브 '다시보기 중단'을 결정했다가 거센 논란이 일자 재개했다. 다시보기 중단 사유는 공정성과 균형성을 위반했다는 것. 시청자 중 선임된 방송 모니터 요원은 박 앵커 멘트에 “'침묵의 커튼 뒤에 숨은 이들'이라고 특정 대상을 겨낭해 발언했는데, 라이브에서 이렇게 대단히 정치적 의사를 표출한 것이 적절했는지 의문스럽다”고 했다고 한다.
박 앵커가 멘트를 통해 자기 의사를 표현한 것 자체가 문제일 수 없을 뿐더러 그 수위도 높다고 보기 어렵다. 매일 같이 '정권 쓴소리'로 뉴스를 마무리하던 신경민 앵커가 하차했던 2009년 당시 언론학자들은 “앵커 멘트는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고 경영진이 앵커 멘트의 “권력 감시 기능”을 인정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더욱이 손석희 전 JTBC 뉴스룸 앵커의 '앵커 브리핑' 이후 방송사 앵커들은 의견을 담은 클로징 멘트로 오늘의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KBS 조치가 옹졸해 보였던 이유다.
그러나 박 앵커 클로징은 몇 가지 '사실'을 빠뜨리고 있다. 그가 고대영 KBS 사장 비서실장을 지냈다는 점이다. 고대영 사장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그는 2017년 9월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던 KBS 기자·PD들과 대척했다. 기자·PD들이 한창 파업 중이던 그해 10월 국회에서는 KBS를 피감기관으로 하는 국정감사가 열렸고, 고대영 사장은 KBS 기자들의 물리적 저항을 뚫고 어렵사리 국정감사에 착석했다.
고 사장이 국정감사 회의장을 뜨자 KBS 기자들을 포함한 언론사 취재, 카메라, 사진 기자들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고 사장은 경호 속에 엘리베이터로 현장을 빠져나갔다. 국회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내려가던 박 앵커는 “애들(KBS 기자들)이 저렇게 깽판을 치는 게 (오히려 더) 여론에 괜찮다”며 정치적 유불리부터 따졌다. 후배·동료 기자들은 공정방송을 요구하며 50일 넘게 파업하고 있던 시기였다.
박 앵커 말처럼 '고대영 전 KBS 사장 해임은 위법하다'는 판결은 지난달 29일 확정됐다. 해임을 강행한 당시 KBS 이사회와 문재인 전 대통령이 무책임하게 침묵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판결문은 KBS 신뢰도와 영향력을 추락시키고 파업 사태를 초래하고도 해결하지 못한 고 전 사장 책임도 작지 않다고 판시했다. “2017년 KBS 대규모 파업 사태 원인은 고대영 전 사장이 KBS 보도에 부당하게 관여해 왔고 이로 인해 KBS 신뢰도와 공정성이 심각하게 훼손됐다는 점에 관해 KBS 직원들의 불만과 불신이 누적됐기 때문이고 이에 고 전 사장 책임이 없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고 전 사장 해임 사유 가운데 하나인 '방송법 등을 위반한 인사처분 남발'에 관해 “KBS 기자들에 대해 위법한 인사 처분이 이뤄진 것에 대해 원고(고대영)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는데, 2016년 7월 박근혜 청와대의 KBS 보도 개입에 침묵하는 자사 간부들을 비판했던 정연욱 KBS 기자를 제주방송총국으로 파견 및 전보 조처한 게 대표적이다. 정 기자에 대한 인사발령은 법원에서 무효로 확정됐다.
2016년 당시 정지환 보도국장을 포함해 KBS 보도본부 국·부장단 일동 31명은 제주총국 발령을 받은 7년차 정연욱 기자를 겨냥해 “회사 명예를 실추시키고 무사하길 바라느냐”는 비난 성명을 발표하며 파문을 일으켰다. 이들은 “KBS인으로서 KBS를 팔아 이름값을 올렸으면 당당하게 뒷감당도 하는 게 당연한 자세가 아니냐”며 사측의 부당 인사에 적극 찬동했다. 박장범 앵커는 성명에 이름을 올린 31명 중 하나였다.
박 앵커를 포함한 31명은 정 기자에게 사과나 유감 표명을 하지 않았다. 정 기자는 5일 통화에서 “현재 (윤석열 정권과 발을 맞춰) 전면에 나서고 있는 KBS 인사들은 2016년에는 폭압적 부당 인사의 주범들이었다”며 “기자 사회를 억압하는 데 앞장 섰던 수뇌부들”이라고 비판했다. 정 기자는 “인사발령이 부당하다는 판결이 확정됐는데도 사과나 반성, 공식 입장 표명은 없었다”며 “(박 앵커는) 본인이 연루된 과거 사건엔 한마디도 없다가 이번 앵커 멘트를 했는데 정치적 목적이 있다고 본다”고 꼬집었다.
박 앵커는 정 기자에 대한 부당 인사에는 침묵하고 있지 않은가. 판결을 겸허히 수용하고 반성한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는 항의 표시인지 침묵의 커튼 뒤에 숨은 그의 생각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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