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RA사태 다시 없다"… 4대그룹, 美의회 반경 3㎞내 전초기지
인력 늘리고 정관계 창구로
워룸 형태로 정책동향 분석
美의원 정치자금 모금행사도
기업, 美로비자금 역대 최대
11월 미중 정상회담 성사땐
공급망 정보파악 최대 현안
◆ 워싱턴 정보대전 ◆
미국 워싱턴DC의 중심부인 의회의사당(캐피톨). 이곳을 중심으로 반경 3㎞ 내에서 한국 재계가 총성 없는 정보전을 펼치고 있다. '미국 정치 1번지'로 불려도 손색없을 만큼 연방 상·하원 의원 535명이 일하는 캐피톨힐의 입지는 뛰어나다. 이곳에서 내셔널 몰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면 연방대법원과 미국 대통령 집무실인 백악관을 차례로 만날 수 있다. 또 의회에서 좌우로 뻗어나가는 펜실베이니아애비뉴와 인디펜던스애비뉴를 통해 차로 10분 내에 국무부·재무부·법무부·상무부 등 주요 부처 청사에 닿을 수 있다.
삼성·SK·현대차·LG 등 한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이 바로 이곳 캐피톨힐을 중심으로 현지 사무소를 두고, 미국 고위 관료 출신 등 거물급 인사를 영입해 미 관가·의회와 소통을 강화하고 있는 이유다.
지난해 말 국내 한 글로벌 제조기업 임원 인사에서 해외 대관 업무를 총괄했던 사장급 인사가 교체되면서 인사 배경을 두고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의 후폭풍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지난해 8월 미 의회에서 IRA가 통과될 때까지 관련 정보 수집이 제대로 안 됐고, 대응책 마련이 늦어진 여파라는 것이다. 실제로 IRA와 반도체·과학법(CHIPS) 등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위한 미국의 공격적 입법은 국내 대기업이 일제히 워싱턴 정보 라인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미·중 충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 탄소 규제 같은 이슈들이 국내 수출 전선에 큰 변수로 작용하면서 미국 현지 입법·규제 정보에 대한 수요가 커진 것이다.
특히 4대 그룹의 경우 총수가 수시로 미국을 찾아 정·관계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현지 대관조직이 확대되고, 현지 사무소 인력이 늘어나고 있다. 아울러 이들 그룹은 본사 글로벌 대외협력 조직 역량 강화를 위해 미국통으로 꼽히던 한국 관료 출신 인사들을 속속 영입하면서 본사와 워싱턴 조직 간 유기적 협업을 확대하는 모습이다. 한국 주요 기업들이 최근 수년간 미국 내 반도체·가전·2차전지 등 관련 대규모 투자를 실시하면서 현지 사업 전반을 관리해야 할 필요성이 커진 점도 이 같은 협업의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3월 마크 리퍼트 전 주한 미국대사를 북미지역 대외협력팀장으로 영입하고 미국 관가·의회와 소통을 강화하고 있다. 북미지역 대외협력팀 인력의 절반에 해당하는 15명이 워싱턴사무소에 배치됐다. 외교통상부 통상전략과장 출신 김원경 부사장과 산업통상자원부 미주통상과장 출신 권혁우 상무 등 한국 본사 글로벌대외협력(GPA)팀과 유기적인 업무 체계를 가동 중이다.
이곳 사무소 역시 단순 사무소를 넘어 미 의회 주요 의원의 정치자금 모금 행사를 수시로 여는 등 정치권 인사들의 소통 공간으로 기능을 확장하고 있다. 이곳에선 미국 반도체 수출 통제 정책과 관련된 동향 보고가 실시간으로 이뤄지며 정책 워룸(전시상황실)으로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지난해 워싱턴에 첫 사무소를 낸 LG그룹은 지난 5월 이를 LG 계열사 제품 전시장 콘셉트로 리모델링했다. 단순히 대관 사무소를 넘어 미 정가에서 LG의 존재감을 알리는 거점으로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는 평가다. 아울러 워룸 형태의 정책 모니터링 공간을 만들어 2차전지 관련 정책 동향 등을 수시로 점검하고 있다. LG는 지난해 1월 조 헤이긴 전 백악관 부비서실장을 워싱턴 공동 사무소장으로 영입하며 워싱턴 대관조직을 본격 강화하기 시작했다. 헤이긴 LG 워싱턴사무소 소장은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부터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까지 공화당 소속 대통령 4명의 재임 시절 총 15년간 백악관에서 근무한 '백악관 터줏대감'이다. 7명 체제로 시작한 LG그룹 사무소는 최근 LG에너지솔루션, LG전자, LG화학에서 추가 파견되며 직원이 10여 명으로 늘었다. 임병대 전무가 공동 소장을 맡고 있다.
SK그룹 워싱턴사무소의 경우 현지 인력 채용을 확대하면서 근무 인력이 늘자 그동안 한 지붕 아래에 있던 SK하이닉스가 올해 초 별도의 사무실로 독립했다.
현대차그룹 사무소 수장은 2020년 현대차그룹에 합류한 미 법제처 차관보 출신 로버트 후드 부사장이다. 이곳 사무소에서는 한국 파견 인력 4명을 포함해 10여 명이 근무 중이다.
4대 그룹 외 포스코·한화 등 글로벌 기업들과 경제단체들도 워싱턴 정보망을 강화하고 있다. 포스코는 최정우 회장이 주도해 온 2차전지 소재 사업 지원을 위해 인력 추가 파견 등 워싱턴 사무소의 기능을 강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한화그룹에선 미국 내 태양광·에너지·방산 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김동관 부회장이 워싱턴을 수시로 찾아 미 정·관계 인사들과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방산 사업이 주력축인 한화그룹은 미 국방부(펜타곤) 인근에 사무소를 두고 있는데, 이곳 책임자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상원의원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대니 오브라이언을 올해 초 영입했다.
이제까지 그룹 총괄 대관사무소 역할을 하던 워싱턴 사무소가 계열사별 별도 사무소로 분화하고 있는 점도 최근 눈에 띄는 변화다. 사업부문별 세밀한 정보 수요가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에선 삼성SDI가 지난해부터 워싱턴 내 별도 대관 조직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SK그룹에선 SK온의 북미법인인 SKBA가 별도의 대관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
이 같은 현지 대관 조직 확대는 한국 기업의 미국 로비자금 확대로 이어지며 지난해 4대 그룹 대미 로비액은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기업들의 대미 로비자금 공개자료를 취합·분석하는 비영리법인 오픈시크릿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해 579만달러를 지출했는데, 이는 2020년 대비 74% 증액된 액수다. SK그룹은 2021년 368만달러에서 2022년 527만달러, 현대차도 291만달러에서 336만달러로 로비자금이 늘었다.
현재 주요 그룹 워싱턴 대관 조직의 최대 현안은 오는 1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성사될 가능성이 높은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간 정상회담 결과다. 양 정상이 합의점을 찾을 경우 반도체·전기차·2차전지 등 미국과 중국 양쪽에 수출 규모가 큰 국내 기업들은 전략을 재수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오수현 기자 / 워싱턴 강계만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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