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길의 세계,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나의 자기검열
정의길 | 국제부 선임기자
러시아에서 바그너 용병부대의 수장인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지난달 24일 무장반란을 일으키자, ‘푸틴 체제 종말의 시작’이라는 평가가 쏟아졌다. 반란의 파장이 걷히고 나자, 푸틴 체제의 종말이 시작됐어도, 종말 자체는 먼 훗날이 될 공산이 커졌다.
반란 사태는 이상했다. 프리고진과 그 부대원들이 점령했다는 로스토프나도누의 러시아군 남부군구 사령부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프리고진과 러시아군 장교, 바그너 부대원과 정부군 병사가 담소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바그너 부대가 그 사령부를 ‘장악’한 것인지, 아니면 러시아 정부군이 그들을 ‘포용’한 것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반란이 일어나고, 반란 세력과 정부군이 한데 어울리고, 수도로 향하는 반란 세력들이 정부군을 공격한 것인지 정부군에 의해 저지된 것인지 불투명하고, 최고통치자는 반란 세력 분쇄에 엄포를 놓았지만, 반란 세력은 사면됐다. 이 모든 양상이 결국 러시아 체제가 이완되고,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징표일 수 있다. 서방의 기준에서 보면, 한마디로 ‘개판’일 수 있다. 문제는 그 개판을 서방에서 잘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윈스턴 처칠이 했다는 말이 있다. ‘크렘린의 정치 음모는 양탄자 밑에서의 불도그 싸움과 비유된다. 외부자는 단지 으르렁거리는 소리만 들을 뿐이지, 뼈다귀가 그 밑에서부터 튀어나오는 걸 볼 때에야 누가 이겼는지가 명확해진다.’ 서방의 입장과 관점에서 러시아가 개판이지만, 이를 관찰하기에는 역부족임을 인정하는 말이기도 하다. 프리고진의 반란 사태에서도 으르렁 소리만 들었고, 이른바 ‘희망 사항’에 입각해 해석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반란이 진정된 이후에도 서방 당국이나 언론은 프리고진 반란에 유력 장성인 세르게이 수로비킨 우주항공군 사령관이 동조해 구금됐다는 등 러시아 군부의 이탈을 전파했다. 수로비킨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딸이 언론에 등장해 아버지는 정상적으로 집무 중이고 좀처럼 언론에 말하는 성향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수로비킨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서방에서 유포된 그의 숙청설을 나중에 머쓱하게 만들려는 역공작일 수도 있을 가능성이 커졌다.
해체가 불가피하다는 바그너그룹이 벨라루스에 가서, 우크라이나 북부에 제2전선이 열릴 수 있다고 우려한다. 바그너그룹은 며칠 사이에 러시아의 전쟁 수행에 칼을 꽂았다가 다시 우크라이나를 위협하는 최대 전력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윌리엄 번스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반란 해소 이후 세르게이 나리시킨 러시아 대외정보국(SVR·전 KGB 해외파트)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은 개입하지 않았다. 이것은 러시아 내부 문제다”라며 선을 그었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이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민감한 사안을 놓고 러시아와 접촉해온 번스 국장이 이런 의견을 전달한 것은 이번 사태로 푸틴의 권력과 체제가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판단이다.
서방에서 가장 주시하는 우크라이나 전쟁에 미치는 영향도 현재로선 크지 않다. 반란 당일에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습은 계속됐다. 우크라이나의 반격 공세가 힘을 얻을 것이라는 희망 사항도 현실화되는 기미가 없다. 오히려 러시아가 동부전선에서는 공세로 전환했다.
우크라이나가 반격 공세를 펼친다고 하는데, 공세를 펼치는 쪽은 방어하는 쪽에 비해 통산 3 대 1 정도의 전력 우위를 갖춰야 한다. 인구와 자원, 무기에서 우세한 러시아는 이미 지난해 말부터 현 전선 굳히기로 들어갔다. 우크라이나 반격 공세가 시작된 지 한달이 지났으나, 러시아의 최전선 방어선을 돌파했다는 소식은 없다. 서방이나 우크라이나에서는 반격 공세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말뿐이다.
평화협정은 고사하고 정전협정도 없이, 현 전선에서 국지전을 벌이다가 굳어지는 ‘동결된 전쟁’이 현재로서는 가장 가능성이 크다. 왜 평화협정이나 정전협정의 가능성이 희박하고, 그저 싸우다가 지쳐서 굳어져버리는 상황이 유력하냐면, 이 전쟁을 둔 양쪽의 화해할 수 없는 세계관 때문일 것이다. 사건과 전황을 자신들의 이상과 가치에 유리하게 해석하는 프로파간다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귀와 눈을 사로잡고 있다.
노르트스트림 해저 가스관 폭파, 자포리자 원전을 둔 공방 사태, 노바카호우카댐 폭파 사건 등을 놓고 상식적인 질문을 하면, ‘너는 누구 편이냐’는 질문부터 날아든다. 그 사건들은 무조건 특정 쪽의 소행이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누구 편이지’ 하는 자기검열에 빠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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