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여공 잔혹사, 살기 위해 죽는다는 아사동맹(餓死同盟)
고무공장 '동업회' 조직해 임금 30% 삭감 12개사 200여명, 죽음 각오하고 동맹파업 조선 노동계 첫 아사동맹에 경찰 해산명령 사측, 상여금 보상 제시했지만 통지 번복
모순(矛盾)이란 말이 있다. 창과 방패를 파는 초(楚)나라의 어떤 상인의 말에서 유래된 성어(成語)다. 사실의 앞뒤, 또는 두 사실이 이치상 서로 맞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다. 살기 위해서 굶어 죽기를 각오했다면 이 또한 모순된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를 각오한 여성들의 '아사동맹'이라는 것이 100년 전 이 땅에 있었다. 그 가슴 아픈 이야기를 찾아 100년 전으로 떠나 본다.
'고무공장 여공의 맹휴(盟休)'라는 제목의 1923년 6월 28일자 조선일보 기사다. "지난 10일경에 시내 각 고무공장의 주인들이 모여서 동업회(同業會)를 조직하고 의논한 결과, 조선 여공의 임금이 현재 일본인보다는 적으나 그 대신에 제조 수가 적고 더불어 신발값이 3할이나 내렸으므로 그대로 둘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각 공장에서 주는 임금이 모두 일치하지를 못한 즉, 이것을 일치하게 하되 보통은 4전, 큰 것은 5전, 눈 새기는 것은 7전으로 일치하게 하여 지난 16일부터 실행하기로 하였다는 바, 이것을 이전에 비하면 2할 5푼이 감하였으므로 그렇지 않아도 곤란한 생활에 있는 여공들은 동맹휴업하기를 시작하여 시내 공장 12개에 총 여공이 300여명인데 200여명은 동맹에 참가하였고, 동맹으로 인하여 희생한 자가 10여명에 달하였으며, 총히 12개 공장 안에서 동맹을 실시한 곳이 7개 공장이요, 아직 관망만 하고 있는 곳이 2~3개 공장이 되는바, (중략)"
이어 1923년 7월 3일자 조선일보에 '광희문 100여명의 여공(女工)이 또 파업'이라는 기사가 보인다. "광희문 밖 해동(海東)고무공장 등 4곳의 120여명의 여직공이 역시 임금 문제로 동맹파업을 하였다는데, 어떤 공장에서는 그 주인 측으로부터 직공들을 억지로 공장 안에 몰아넣고 강제로 일을 시키려고 하는 즈음에 자연히 서로 시비가 일어나서 직공 중에 어떤 사람은 팔을 비틀려서 부상한 사람도 있고, 기타 매를 맞은 사람도 많은바 그와 같이 억울한 일을 당한 직공들은 어찌 할 줄을 모르다가 어제 오후에 시내 수송동 각황사에 모여 선후책을 의논한 일이 있다는데, 그 자세한 사실은 아직 어찌 될지 모른다더라."
고무공장 여직공들이 과연 어떤 상황에서 일을 했기에 임금 삭감에 대해 죽기를 각오하고 동맹파업을 했을까. 1923년 7월 6일자 조선일보를 보자. '고무공장 여직공의 애화(哀話)'라는 제목의 기사다. "생활 곤란이 극도에 달한 중에서 모진 목숨을 보전해 보려고 수입이라고 얼마 되지 못하는 고무공장의 직공 생활을 하는 그들의 머리 위에 임금 문제가 내리 눌러서, 그도 저도 못하고 도로에서 방황하는 여직공들의 애화(哀話)를 들으면 (중략) 이 여직공들은 누구든지 생활상 핍박을 이기지 못하는 동시에 자기의 체질이 연약함을 불구하고 아무쪼록 늙은 부모와 어린 자식의 기한(飢寒)을 면하게 하고자 하여 수입도 변변치 못하지마는 고픈 배를 졸라 매어가며 고무공장에 다니면서, 다만 얼마라도 벌어볼까 하는 것이 올시다. (중략) 공장에를 가서 불같이 내리쪼이는 양철 지붕 밑에서 끓는 화로를 안고 앉아서 비지땀을 흘리며 일을 하는데, 가위 자국에 손가락마다 성한 곳이 없이 못이 박힙니다. 이와 같이 비참한 속에서 그중 잘하는 사람이 30원, 그중 못하는 사람은 14~15원을 받게 되지 못한 즉, 그것을 가지고 물가가 고등(高騰)한 이 시대에 일가족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중에 우리의 피를 빨아서 자기 뱃속의 기름이 지게 하려는 주인 측에서는, 조합인지 무엇인지 만들어 가지고 그와 같이 간신(艱辛)한 임금을 3분의 1이나 내리니 그것을 받고야 그 고생을 할 수가 있습니까."
여성 직공들의 동맹파업은 별다른 해결 기미도 없이 여러 날을 경과했다. 공장 측은 강경하게 나왔다. 파업한 직공은 전부 해고하며 절대로 다시 받지 아니하며, 이후에라도 동맹파업에 참가하는 직공은 즉시 해고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1923년 7월 13일자 동아일보)
동맹파업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1923년 7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자. "경성부 내에서는 처음으로 생긴 여자 고무 직공의 동맹파업 사건은 쌍방이 다 태도가 강경하여 원만한 해결을 얻지 못하고 파업한 직공 전부는 그제 아사동맹까지 조직하여 일동이 광희정 공장 문밖에서 하회(下回)만 기다린다. (중략) 듣기만 해도 무서운 아사동맹은 그들의 최후의 수단인 동시에 조선의 노동계급에서는 최초의 사실이라. 아사동맹은 과연 일주야(一晝夜)까지 지낸 어제 오전까지도 의연히 계속되어 (중략) 정오에 불볕에 흘린 땀을 거두기도 무섭게 불의의 소낙비도 맞았고 베 치마 적삼에 스며든 빗물이 마르기도 전에 음습한 저녁 이슬까지 맞아가면서도 150여명의 직공들은 아카시아 그늘에서 하룻밤을 새었다. (중략) 강경한 공장 측의 태도는 여전히 냉정하여 청하는 물까지도 주지 아니 하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관할 경찰서는 치안경찰법과 도로취체규칙 등에 의지하여 해산을 명령했다. "이 까닭으로 그들은 모처럼 가져온 국밥도 못 먹고 7시경에 헤어져 시내 견지동 노동연맹회에 다시 모여 선후책을 협의하였는데 (중략) 관할 종로 경찰서에서는 삼륜(三輪)경부가 정사복 순사 10여 명을 데리고 현장에 와서 해산을 명하는 동시에 불의의 변(變)을 경계하였다더라." (1923년 7월 9일자 동아일보)
이후 삭감한 임금 대신 상여금을 주어서 수입이 전과 같이 되게 해 줄 터이니 다시 일을 하라는 통지가 왔다. 근심에 싸여 있던 직공들은 다시 살 방법이 생겼다고 공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 통지는 번복됐다. 7월 12일자 조선일보는 "직공들은 다시 낙심천만(落心千萬)하여 눈물을 흘리고 돌아섰다"고 전한다.
이를 보고 동아일보 기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살자고 생겨난 세상에 살 수가 없어서 죽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엄숙한 비극인가." 이런 엄숙한 비극이 지금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할 자신이 없다.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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