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그림에 끌려…에드워드 호퍼 열풍
관련 책 판매도 2배 이상 늘어
예술가가 사랑한 '美 국민화가'
급변하는 20세기 삶의 불안감
가상의 공간과 빛으로 위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슬프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지는 않는다. 호퍼 예술의 중심 주제는 외로움이다."
'일상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동물원에 가기'에서 이렇게 썼다.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쓸쓸한 그림에 매료된 관람객들이 미술계와 함께 출판계에도 온기를 불어넣고 있다. 지난 4월 개막한 서울시립미술관 전시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인기는 광풍에 가깝다. 미술관에 따르면 5일까지 누적 관람객 21만명을 돌파했다.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신작도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 예스24에서는 호퍼 관련 도서가 전시 개막 직후인 4월에만 3월 대비 판매량이 241.4% 증가했다.
국내에 출간된 7종의 호퍼 관련 도서 중 가장 많이 팔린 건 전시에 발맞춰 출간된 얼프 퀴스터의 '호퍼 A-Z'로 호퍼의 생애를 알파벳 키워드로 정리한 책으로 미술 분야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6월에는 국내 작가가 쓴 신작 '에드워드 호퍼의 시선'도 출간됐다. 미술사가 이연식이 호퍼의 그림 세계를 조명하고 분석한 책이다. 극장, 정거장, 에로티즘 등 15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호퍼의 삶을 돌아본다.
호퍼의 삶을 가장 충실하게 만날 수 있는 책은 을유문화사에서 2012년 출간된 게일 레빈의 평전 '에드워드 호퍼'지만 아쉽게 현재 절판됐다. 휘트니미술관에서 호퍼의 첫 큐레이터로 일했던 레빈은 호퍼를 '빛의 화가'로 묘사했다. "호퍼는 빛으로 그림을 완성하며, 빛이 그림 속에서 얼마나 강렬한 힘을 발휘하는지 보여준다"고 썼다.
재미있는 것은 호퍼가 유난히 예술가들에게 사랑을 받는 화가라는 점이다. 이유는 뭘까. 1990년 미국의 계관시인으로 추대된 마크 스트랜드의 '빈방의 빛'(한길사)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말년에 시 쓰기를 그만두고 미술작가로 활동하며 전시도 열었던 시인은 비평가들의 낡은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그는 "20세기 초 미국인들이 겪은 삶의 변화에서 비롯된 만족감과 불안감을 보여준다고 하는데, 이것만으로는 관객들이 그토록 강렬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다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호퍼의 그림은 현실이 드러내는 모습을 넘어서는 것으로, 어떤 '감각'이 지배하는 가상 공간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이 책의 주제는 바로 그 공간을 읽어내는 것"이라고 호퍼가 만들어낸 상상의 공간의 탁월함을 상찬한다.
서울 전시에 공수된 '오전 7시'에 대해 시인은 작가의 공간 연출에서 숨겨진 의미를 특유의 상상력으로 복원해낸다. "이 그림에서 숲은 상점 대신 갈 수 있는, 으스스한 대안이다. 상점은 숲과는 달리 일련의 질서를 보여준다." '햇볕 속의 여자'를 두고는 "묘사된 여자는 그 누구의 미적 관념에도 맞지 않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그녀는 엄청난 존재감으로 방 안을 다소 울적하고 사색적인 에로스로 가득 채운다"면서 "전날 밤 잠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추측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그녀의 과거는 그녀의 뒷모습처럼 그늘에 가려져 있다"고 해석한다. 시인이 매료된 건 호퍼가 숨겨 놓은 '이야기'였던 것이다.
단편소설집인 '빛 혹은 그림자'(문학동네)가 출간된 것도 이례적인 일이다. 2017년 출간된 이 책은 스티븐 킹, 조이스 캐럴 오츠, 마이클 코널리 등 17명의 작가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17점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스릴러, 드라마, 범죄소설 등을 모아 엮었다. 20세기 초 자동판매기로 음식을 판매하던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실은 책의 기획자 로런스 블록의 '자동판매기 식당의 가을', 1932년 작 '뉴욕의 방'을 선택해 대공황 시기를 사는 어느 부부의 이야기를 그린 스티븐 킹의 '음악의 방' 등이 실렸다. 피에로와 짙은 화장의 여자가 담긴 '푸른 저녁'을 모티브로 쓴 소설도 있다. 로버트 올렌 버틀러는 광대와 여자, 그리고 화자(화가 본인)와 옆자리에 앉은 남자(르클레르 대령)를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아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로런스 블록은 서문에서 호퍼의 그림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면서 "다만, 그 그림들 속에 누군가가 읽어주기를 기다리는 이야기들이 들어 있음을 '강렬하고도 거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암시할 뿐"이라고 썼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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