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흥륜사지’ 아니라 ‘영묘사지’? 경주 흥륜사 터 인근서 유물 쏟아져

도재기 기자 2023. 7. 5.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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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묘사’ 명문 기와 출토···“영묘사 터로 확인”
고려시대 청동 향로 등 50여점 담긴 철솥, 통일신라 불상도
문화재청, 사적 ‘경주 흥륜사지’ 주변 발굴조사 결과 공개
사적인 ‘경주 흥륜사지’ 인근 발굴조사에서 통일산라~고려시대에 이르는 많은 유물들이 발굴됐다. 유물 중에는 ‘영묘사’라 판독되는 명문 기와 조각(왼쪽)도 확인됐다. 문화재청 제공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 터로 추정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된 ‘경주 흥륜사지’에서 ‘靈廟寺(영묘사)’ 글자가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굴됐다.

또 통일신라 시대의 금동 불상은 물론 향로·촛대 등 고려시대 청동 유물 50여 점이 철솥 안에 담긴 채 무더기로 확인됐다.

흥륜사지는 ‘신라의 미소’로 유명한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보물) 출토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과거 ‘영묘지사(靈廟之寺)’ 명문 기와조각이 발견된 이후 그동안 학계와 지역에서 ‘흥륜사지’보다 ‘영묘사지’란 명칭을 써야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돼온 곳이다. 흥륜사지와 영묘사지로 명칭이 혼용돼온 상황에서 이번 명문 기와 발굴로 공식적으로 ‘영묘사지’란 명칭을 써야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됐다.

고려시대 향로와 촛대 등 50여 점의 청동 유물들이 담긴 철제 솥도 출토됐다. 문화재청 제공
‘경주 흥륜사지’ 인근 발굴조사에서 나온 각종 유물들의 일부. 문화재청 제공

흥륜사(興輪寺)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문헌기록에서 신라 최초의 사찰로 확인된다. 불교 전파를 위해 신라에 온 고구려 승려 아도가 미추왕의 허락 아래 지은 신라의 첫 사찰이라 전해진다. 미추왕 사후 폐사가 되자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된 법흥왕 대인 527년 다시 짓기 시작해 544년(진흥왕 5년) 완공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학계에서는 황룡사·사천왕사 등과 함께 신라 최대 규모의 사찰로 역할을 하다가 조선시대에 폐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영묘사는 문헌기록상 신라 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년) 당시 창건된 사찰이다. 흥륜사와 함께 이른바 ‘칠처가람’(신라시대에 신성한 숲 7곳에 세워진 사찰)의 하나로 창건 당시에는 대규모 사찰이었으며, 조선 초기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흥륜사와 영묘사는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신라시대 주요 사찰이지만 현재 정확한 위치는 추정만 할 뿐이다.

이번에 발굴돼 ‘영묘사’로 판독되는 명문 기와조각(왼쪽)과 이전에 발굴된 ‘영묘지사’ 명문 기와 조각. 그동안 ‘흥륜사지’는 ‘영묘사지’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문화재청 제공

문화재청은 5일 “경주시와 (재)춘추문화재연구원이 흥륜사지(경주시 사정동) 서쪽 하수관로 설치공사를 위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상, 청동 공양구들, 기와와 토기, 사찰과 관련된 건물지와 담장지·우물 등 통일신라~고려시대에 걸친 다양한 유물과 유구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영묘사’명 기와 조각과 함께 다양한 형태의 고려시대 청동 공양구·의식구들이 철솥 안에 담겨진 채 발굴됐다. ‘영묘사’명 기와 조각은 기와 표면에 세로로 ‘영묘사’란 글자가 도드라져 있다. 발굴단은 “아직 정확한 판독은 아니지만 눈으로 볼 때나 기존 명문 자료와 비교할 경우 ‘영묘사’란 글자로 판독된다”고 밝혔다.

1980년대 세워진 흥륜사가 자리하고 있는 사적 ‘경주 흥륜사지’ 일대 모습. 이번 발굴조사 지역은 붉은 색으로 표시된 사진의 위쪽이다. 문화재청 제공

고려시대 불교 의례 용품인 청동제 유물 50여점은 지름 65㎝, 높이 62㎝ 크기의 솥안에서 급하게 담아놓은 형태로 발견됐다. 4개의 손잡이가 달린 철솥 속에 작은 기와 조각들이 섞여 있는 흙이 30㎝ 정도 차 있고, 그 아래에서 청동 향로와 촛대·금강저(승려들의 수행 대 사용하는 도구) 등이 확인됐다. 발굴단은 “현재 육안으로 확인되는 유물은 모두 54점이고 일부 유물은 부식돼 철솥 바닥에 붙어있는 상태”라며 “보존처리 과정에서 더 많은 유물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유물들이 솥 안에 무더기로 담긴 채 땅에 묻혀진 상황과 관련, 발굴단은 “큰 화재나 이례적인 사고 등 비상 상황이 발생해 스님들이 급하게 철솥 속에 모아 땅속에 묻어둔 이른바 ‘퇴장 유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발굴단에 따르면, 그동안 전국적으로 청동 유물들이 급하게 묻힌 듯 무더기로 출토된 사례는 10건을 넘어선다. 창녕 말흘리 유적에서는 철솥과 금동병향로 등 500여점(통일신라시대)이, 군위 인각사지에서는 청동정병 등 7점(통일신라시대)이, 고려시대 유물로는 서울 도봉서원(영국사지)에서 79점이, 청주 사뇌사지에서 430여점이, 경주 굴불사지에서 16점 등이 무더기로 확인됐다.

경주 흥륜사지(영묘사지)는 ‘신라의 미소’로 유명한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보물)가 출토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문화재청 제공

발굴단은 “이번 발굴 유물들은 비교적 수량이 많아 앞으로 관련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며 “과학적 보존 처리와 분석 등 면밀한 연구를 위해 모두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로 긴급 이관했다”고 밝혔다.

발굴단은 또 “이번 유물들의 출토 지역은 1980년대에 세워진 현재의 흥륜사 서쪽 일대”라며 “발굴조사에서 건물지, 담장지 등도 확인된 만큼 당시 영묘사 사역이 지금보다 훨씬 더 컸을 것으로 추정할 수있다”고 밝혔다.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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