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의 인문학이 필요한 시간] 문·사·철 무장한 선비들 배움과 말과 행동의 일치 조선 500년 지탱한 힘되다

허연 기자(praha@mk.co.kr) 2023. 7. 5.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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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필요한 선비 정신

◆ 매경 포커스 ◆

게티이미지뱅크

"나라의 근본은 망해가고 하늘의 뜻도 민심도 이미 떠나버렸습니다. 작은 벼슬아치들은 주색에 빠져 있고, 큰 벼슬아치는 자기 배 불리는 데만 힘쓰고 있습니다. 대비는 궁궐의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선왕의 외로운 아들에 불과합니다. 억만 갈래로 갈라진 민심을 어찌 감당하고 수습하시겠습니까. 온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한 사람 책임지려 하지 않습니다. 임금으로서의 원칙을 세우십시오."

명종 10년인 1555년 남명 조식이 벼슬을 거절하면서 올린 '사직상소문(辭職上疏文)'이다. 대비를 '과부'에 비유하고, 왕을 '외로운 아들'에 비유한 이 상소는 목숨을 걸고 올린 것이었다. 무엇이 일개 산림처사로 하여금 이런 용기를 가능하게 했을까? 초야에 묻혀 있던 한 지식인이 벼슬 자리를 거절하면서 올린 상소문은 조선시대 선비정신의 단면을 보여주는 적절한 예다.

조선은 500년을 존속한 왕국이었다. 단일 성씨 왕조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장수를 누린 왕국이다. 끊임없이 외세에 휘둘리고 당파싸움으로 날이 새던 나라가 어떻게 장수할 수 있었을까?

악조건 속에서도 조선이 500년의 수명을 누린 근본 바탕에는 선비정신이라는 기본값이 있었다. 선비는 조선이 만들어낸 이상적인 지식인상이자 정치인상이었다.

물론 모든 선비가 귀감이 될 만한 삶을 산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선비정신이 실용주의와 배치되는 측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선비정신이라는 궁극적인 가치가 있었기에 조선의 역사는 유지될 수 있었다.

선비의 기본은 학문과 예술을 일치시키는 학예일치였다. 문(文)·사(史)·철(哲)을 바탕으로 이성을 훈련하고, 시·서·화를 통해 감성을 체질화한 사람이 선비였다. 조선시대 큰 선비들은 오늘날의 왜소한 지식인과 곧잘 비교된다. 선비들의 꼿꼿한 지조와 강인한 기개, 청정한 마음가짐과 생활자세는 지금 재조명해야 할 우리의 소중한 전통자산이다.

조선을 대표했던 큰 선비들이 남긴 일화를 살펴보면 그들이 지금의 위정자들과는 사뭇 다른 언행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대학자이자 선비의 표상이었던 퇴계 이황이 쓴 시 중 '반타석(盤陀石)'이라는 작품이 있다.

누런 탁류 넘실댈 때는 형체를 숨기더니

(黃濁滔滔便隱形)

고요히 흐를 때면 비로소 분명히 나타나네

(安流帖帖始分明)

아름답다! 이처럼 치고 받는 물결 속에서도

(可憐如許奔衝裏)

천고에 반타석은 구르거나 기울지도 않네

(千古盤陀不轉傾)

'반타석'은 경북 영주 죽계구곡 탁영담에 있는 넓은 바위라고 한다. 큰비가 내려 물이 넘치면 사라졌다가, 물이 잠잠해지면 나타나는 바위다. 퇴계는 오랜 세월 거친 물살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아름다운 자태를 지키는 반타석에 경의를 표한다. 퇴계는 반타석에서 올곧은 선비의 자세를 읽어냈을 것이다. 세파가 몰아쳐도 구르거나 기울지 않은 채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반타석을 보며 퇴계는 자신의 결기를 다졌을 것이다.

퇴계의 삶은 반타석과 같았다. 수없는 정치적 부침 속에서도 원칙을 포기한 적이 없었고, 사사로운 권력욕에 흔들리지 않았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공부와 사색을 중단하지 않았다. 평생을 검약하게 살았고, 백성들을 헤아렸으며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했다.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을 지낸 권철이 도산서원으로 이황을 찾아온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은 저녁상에는 보리밥에 콩나물국, 가지잎에 명태무침이 차려졌다. 이황은 맛있게 음식을 먹었지만 권철은 입에 맞지 않았는지 밥을 남겼다. 헤어질 때가 되어 권철이 퇴계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하나 달라고 부탁했다. 퇴계는 이렇게 답했다.

"대감께서 먼 곳까지 찾아주셨는데 융숭한 대접을 해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러나 대감께 드린 식사는 일반 백성에 비하면 성찬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대감께서 식사를 못 하시는 것을 보니 나라의 장래가 걱정됩니다. 정치의 근본은 여민동락(與民同樂), 즉 관과 민이 일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디 앞으로 백성과 고락을 같이 하시기 바랍니다."

권철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고 이후 몸가짐이 신중한 재상으로 백성들의 신임을 얻었다.

선비의 가장 큰 덕목은 원칙과 의리였다.

사계 김장생은 법도와 원칙을 굽히지 않는 성격 탓에 인조와 사사건건 대립했다. 당연히 인조도 김장생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인조를 끝까지 보호한 것은 김장생이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77세의 노구를 이끌고 피난지인 공주까지 인조를 호위했고,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80세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켰으며 죽는 날까지 왕에 대한 예를 다했다.

임진왜란 때 도승지였던 백사 이항복은 꺼져가는 국가의 운명을 되살린 대표적인 선비였다. 보수세력들을 설득해 왕이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그였다. 도성을 버리더라도 왕이 살아 있으면 언제든지 국가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는 현실적인 주장을 한 것도 그였고, 정치적인 위기에 빠진 이순신을 믿고 지지한 것도 이항복이었다.

왜란이 끝나자 이항복은 47세라는 '젊은 나이'에 '1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영의정에 오른다. 이른 나이에 권력을 손에 쥐었지만 그의 삶은 '깨끗한 모래'를 뜻하는 '백사'라는 호처럼 청빈했다. 말년에 그가 살던 노원촌(지금의 서울시 노원구) 집은 사람이 겨우 드나들 정도로 좁았고,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집에서 책을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기록은 전한다.

상소하면 또 떠오르는 선비가 면암 최익현이다. 그가 올린 '계유상소'는 흥선대원군의 세도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렸다. 대원군의 행태를 낱낱이 고발한 이 상소는 고종의 마음을 움직였고 결국 흥선대원군의 하야로 이어졌다.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다시 도끼와 상소를 들고 광화문에 나타난다. 수호통상조약을 강요한 일본 사신 구로다 교타카의 목을 베라는 뜻이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조약에 가담한 다섯 매국노를 처단하라는 상소를 또 올린다. 그의 나이 73세 때의 일이다. 상소로 안 되자 그는 의병을 일으켰고 결국 체포돼 일본 대마도에 구금된다. 대마도에서 최익현은 "왜놈 땅에서 난 곡식은 먹지 않겠다"며 단식을 하다 결국 생을 마감한다.

선비들의 삶이 준엄한 형식으로만 점철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해학과 위트도 있었다. 벼슬을 등지고 야인으로 살던 연암 박지원이 제자였던 초당 박제가에게 편지를 썼다. 내용은 이렇다.

"진채 땅에서 곤액이 심하니, 도를 행하느라 그런 것은 아닐세. 이 무릎을 굽히지 않은 지 오래되고 보니. 내 급히 절하네.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이. 여기 또 호리병을 보내니 가득 담아 보내줌이 어떠하실까?"

언뜻 보면 아리송한 내용이지만 뜯어보면 분명해진다. 공자가 진채라는 곳에서 7일 동안 밥을 굶은 적이 있었다. 이 일화에 비유해 박지원은 박제가에게 돈을 빌려 달라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이왕이면 술까지 보내라는 익살도 부린다.

편지를 받은 박제가의 답장이 또 기가 막히다. "열흘 장맛비에 밥 싸들고 찾아가는 벗이 못됨을 부끄러워합니다. 공방 2백을 편지 전하는 하인 편에 보냅니다. 호리병 속의 일은 없습니다. 세상에 양주의 학은 없는 법이지요."

공방은 네모난 구멍이 있다는 뜻이니 돈을 의미한다. 직접 찾아봐야 하나 장마 때문에 가지는 못하고 하인 편에 2백냥을 보내니 미안하다는 내용과 술은 못 부친다는 뜻이 담긴 편지다. 호리병을 채우지 않은 건 물론 술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오랜 시간 빈속이었을 스승의 건강을 우려해서였을 것이다.

두 선비는 재능과는 반비례하는 불우한 삶을 살았다.

지배계층의 타락상을 비판하고 형식을 파괴하는 글쓰기를 했던 박지원이나 재능과 혜안을 가지고 있었으나 서얼 출신이었던 박제가 모두 출세가도를 달리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들은 한 많은 세월을 당당하게 헤쳐 나갔다. 그들은 현실적인 권력을 갖지는 못했지만 언행과 글을 통해 동료들과 후학들의 귀감이 됐다.

사실 무인이었던 이순신도 대단한 선비였다. 이순신은 평생 원칙과 정도, 의리를 지킨 선비였다. 호남 선비들이 대거 죽거나 곤욕을 치른 정여립 역모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순신은 전라북도 정읍 현감이었다. 친하게 교류하던 전라도사 조대중이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 죽었다. 주변 사람들은 이순신에게 조의를 표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이순신은 그의 시신 앞에서 통곡을 했다.

"조군이 죄를 자백하지 않고 죽었으니, 그가 유죄인지를 알 수 없다. 그리고 내 어찌 그를 모르는 사람처럼 할 수 있는가?"

오해를 받고 세상의 버림을 받는 일이 있을지라도, 인간의 도리를 외면할 수는 없다는 태도로 일관한 이순신은 선비정신을 실천한 위인이었다. 그의 결기를 보여주는 일화는 많다.

반대파의 공격을 받아서 이순신이 하옥되었을 때 옥리가 가족들을 찾아와 뇌물을 좀 쓰면 벌을 가볍게 받을 수 있다고 귀띔을 했다. 아들이 이순신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자 이순신은 크게 화를 냈다.

"죽게 되면 죽을 뿐이다. 어찌 바른 길을 저버리면서까지 살기를 구할 수 있겠느냐!"

왜 그렇게 융통성이 없었는지 답답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종신폐쇄수도원에서 평생을 수행하는 수행자들이 있기에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유지됐던 것처럼 이런 선비들이 있었기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옛날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옛일에서 오늘을 보는 게 인간의 일 아니겠는가.

[허연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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