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공탁 밀어붙이는 정부···대법원 판례는 “제3자 변제 공탁 불수리 가능”

이혜리 기자 2023. 7. 5. 14:2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역사정의와 평화로운 한일관계를 위한 공동행동’ 관계자들이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외교부가 ‘제3자 변제’를 반대하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및 유족들에 대해 공탁 절차에 나선 것을 규탄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정부가 일본 기업을 대신해 일제 강제동원 피해를 배상한다며 법원에 낸 공탁을 광주지법 공탁관이 ‘불수리’ 결정하자 외교부는 “대법원 판례상 허용되지 않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외교부 주장과 달리 대법원은 공탁관이 ‘제3자 변제 법리’를 이유로 한 공탁 불수리 결정이 정당하다고 판단한 적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5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은 2009년 5월 공탁공무원의 처분에 대한 이의신청 사건에서 이같은 판결을 확정했다.

이 사건에서는 A가 B에 대한 C의 채무를 대신 변제하려고 했으나 B는 C의 동의가 없다는 이유로 변제금 수령을 거절했다. 이에 A가 법원에 공탁을 하려고 하자 법원 공탁관은 ‘A는 이해관계 있는 제3자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공탁을 수리하지 않았다. A는 자신이 이해관계 있는 제3자에 해당한다며 이의신청을 냈다. 정부의 강제동원 제3자 변제안 논리와 구조는 약간 다르지만 쟁점이 같다. 강제동원 피해자 측은 피해자 반대에도 불구하고 채무자인 일본 기업이 아니라 이해관계가 없는 제3자인 정부가 배상하는 것은 민법상 허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의신청 사건을 심리한 창원지법 진주지원, 창원지법, 대법원 모두 공탁관의 불수리 결정이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판결문을 보면 법원은 공탁관에게 판단 권한이 있는지 여부는 쟁점으로 다루지 않았다. 공탁관이 제3자 변제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불수리 결정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그러한 판단 내용이 정당한지만 판단했다. 법원은 그 내용도 정당하다고 봤다.

외교부는 1997년 대법원 판례를 들어 광주지법 공탁관이 제3자 변제 법리를 이유로 불수리 결정한 것은 월권이라고 비판했는데, 그보다 최근에 나온 대법원 판례에서 유사한 결정이 유효하다고 인정된 것이다. 외교부는 또 “공탁 공무원은 공탁 사무의 기계적·형식적 처리를 전제로 운영된다는 게 확립된 대법원 판결”이라고 했다. 하지만 1997년 대법원 판결문을 상세히 살펴보면 공탁공무원이 제3자 변제 법리를 이유로 불수리할 권한이 없다는 게 아니라 공탁관의 형식적 업무처리를 위해 피공탁자가 제대로 특정돼야 한다는 게 판단 취지였다.

대법원 규칙인 공탁규칙 제48조는 “공탁관이 공탁신청을 불수리할 경우에는 이유를 적은 결정으로 해야 한다”며 공탁관의 불수리 절차를 규정한다. 행정예규인 ‘공탁 신청 및 출급·회수에 대한 불수리 결정 업무처리지침’에도 공탁관의 불수리 이유를 제한하는 내용은 없다.

정부가 급박하게 공탁 절차를 밟으면서 기본 형식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신청을 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주지법 공탁관은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 고 박해옥씨와 관련해 낸 공탁 신청에 대해 지난 3일 보정을 권고했다. 피공탁자가 될 수 없는 망인을 피공탁자로 기재했으니 보완하라는 권고였다. 정부는 보정기간 내에 보정을 완료하지 않았고 전주지법은 이날 불수리 결정했다. 광주지법 공탁관도 서류 미비를 이유로 또 다른 피해자 이춘식씨에 대한 공탁 신청을 반려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