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농담 안해"…전쟁 가능성에 '자산 이민' 서두르는 대만
"미국조차 위험하다 봐…대만인들 긴장 중"
대만의 한 주식 투자자인 린은 지난 2월 포르투갈 리스본에 있는 아파트를 매입했다. 가본 적도 없는 아파트 한 채를 사는 데 42만유로(약 6억원)를 들였다. 포르투갈 정부가 ‘황금 비자’(golden visa‧자국에 일정 규모 이상의 돈을 투자한 외국인에게 제공하는 비자) 제도를 폐지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까닭에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대만 밖에 자산을 보관하고 거주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해 둬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의 침공 가능성이 커지자 국외 지역으로 자산을 분산시키고 있는 대만인들이 늘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5일 보도했다. 이런 흐름은 지난해 8월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 이후 중국이 주변 해역에서 대규모 군사 훈련을 실시한 이후부터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집권당인 민주진보당(민진당) 관련 인사들은 특히 예술품이나 다이아몬드와 같은 동산(動産) 투자를 늘리면서 포트폴리오 다변화에 매진하고 있다.
대만 투자 전문가인 C Y 후앙은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이 대만 반도체 기업 TSMC 주식을 팔아 치운 것을 들면서 “부유한 미국인들조차도 대만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대만인들은 긴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만에서의 자금 이탈이 곧) 전쟁 발발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돈은 농담하지 않는 법”이라고 덧붙였다.
대만은 오래전부터 역외 조세피난처에 이전한 자산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였다. 미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UC버클리)의 가브리엘 주크먼 교수가 2018년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대만 국내총생산(GDP)의 22%에 달하는 돈이 조세피난처에 넘어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10%에 못 미치는 전 세계 평균치와 비교하면 2배가 넘는다.
1971년 유엔 회원국 지위를 박탈당하고, 연이어 1979년 미국이 중국과 수교를 맺자 대만 기업들의 불안감은 커져 갔다. 이들은 홍콩과 영국령인 버진아일랜드, 케이맨제도와 같은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 중국 본토 투자를 늘리는 방식으로 위험을 분산했다. 억만장자들은 미국으로의 이민이나 원정 출산 등을 통해 탈(脫)대만 전략을 짰다.
이런 경향은 근래 들어 가속화하는 추세다. 특히 가업 승계를 앞둔 중소기업 오너 가문들 사이에서 장기적으로 지정학 리스크를 헤지(위험회피)해 나가려는 움직임이 뚜렷하다. 대만 KPMG의 패밀리 오피스 부문장인 라우니에이 쿠오는 “이들 기업의 재무제표는 불투명하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투자 자문도 “기업 소유 구조를 은폐하고, 세무 조사를 피해 가기 위한 자산 은닉 수요가 늘고 있다”고 했다.
대중화 경향도 감지된다. 대만의 한 투자 회사 고위 임원은 FT에 “과거에는 억만장자들만이 자산의 국외 이전이 안전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중산층들도 가세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산 이전 대상 지역도 싱가포르, 몰타 등으로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그간 중국 본토나 홍콩에 비해 규모가 작았던 자산관리 업계에서도 이와 관련해 새로운 사업 기회가 창출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번지고 있다고 FT는 전했다.
그러나 대만 역내 자산도 상당한 규모로 유지되고 있다. 자산 이탈 추세가 아직 ‘패닉’ 수준에 이르지는 않았다는 진단이다. 대만 금융투자협회(STICA)에 따르면 역내 펀드 자금 규모는 올해 4월 기준 5조4000억대만달러(약 209조원)로 2017년 말(2조3000억대만달러) 이후 약 6년 만에 2배로 불어났다. 부동산 가격도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중국 상속 자산 자문 그룹(CWHCA)의 위니 팡 회장은 “우크라이나처럼 당장 폭탄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라도 자신이 소유권을 가진 땅은 어디로도 갈 수 없기 때문에 부동산을 팔아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부자들이 여전히 많다”며 “이들은 외부 관리자에게 자산을 맡기는 데 회의적이며, 실물 자산 투자를 선호한다”고 전했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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