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여성 시점’으로 들여다 본 IT업계 이면, 성차별과 착취[플랫]
“세상을 변화시킨다고들 하지만 바뀌지 않는 내부, 성찰부터 해야”
2000년대 초부터 근무 경험 토대 업계 성차별·과로 등 이면 고발
‘네카라쿠배’(네이버·카카오·라인·쿠팡·배달의민족), 억대 연봉, 스톡옵션, 신기술…. 정보기술(IT) 업계 하면 떠오르는 화려한 이미지다. 화려한 조명 뒤편엔 어두운 곳이 있기 마련이다. 48시간 안 자고 일하는 과로문화,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독성말투’,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를 통해 이뤄지는 성착취·범죄와 같은 것들이다. 가려져서 아예 보이지 않는 공간도 있다. 시스템이 굴러가는 데 필수적인 유지·보수 업무를 담당하는 개발자들이다. 이들은 시스템을 ‘돌보는’ 역할을 하지만, 대개 돌봄노동이 그러하듯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다.
테크-페미 활동가 조경숙이 쓴 <액세스가 거부되었습니다>(휴머니스트)는 IT 업계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10년 넘는 경력의 개발자로서 내부적 시선과 여성·페미니스트라는 외부적 시선을 함께 지닌 저자의 렌즈를 통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분투하는 여성 기술 노동자, 무시당하는 유지·보수 노동자, 자기개발과 성장이란 명목으로 이뤄지는 끊임없는 자기착취의 풍경이 펼쳐진다. 지난달 26일 조경숙을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IT 업계는 자신들이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말하지만 업계 전반의 모습만은 결코 바꾸려 하지 않아요. 세상을 바꾸기 전에 내부 성찰이 먼저 필요한 업계라고 생각해요.”
조경숙은 국어국문학과 출신 비전공자로, IT 업계에서 비전공자 채용 바람이 불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 SI(시스템 통합) 기업 개발자로 발을 디뎠다. 비전공자를 채용해 프로그래밍을 가르치는 기초교육 기간 3개월 동안 외출·휴가가 금지된 합숙교육을 받았다. 오전 9시부터 시작해 과제가 끝나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인 생활을 하는 동안 친구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외출을 요청했지만 “연수 과정이 공짜인 줄 아세요?”라는 답변과 함께 거절당했다. 사내 교육팀은 친구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연수를 잘 마친 조경숙을 ‘스트레스 관리 우수 사례’로 인터뷰했다. “ ‘정신력’ ‘스트레스 관리’ ‘회복탄력성’ 따위의 용어를 동원해 압박적인 노동환경을 개인이 돌파해야 할 몫으로 전가하는 경우를 수시로 목격했다.”
“SI는 납기 안에 프로젝트를 끝내지 않으면 자체 벌금을 내기 때문에 개발자들을 갈아넣어서 프로젝트를 완성해야 하는 구조예요. 임산부 시절엔 회사에서 ‘임산부 야근은 불법이니까 야근수당을 올리지 말라’고 해서 못 올린 적이 있어요. 사내에 과로사하는 사람도 있었죠. IT 업계 내부 상황을 밖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10년 동안 기록을 해온 것이 책의 토대가 됐어요.”
책의 부제는 ‘전지적 여성 시점으로 들여다보는 테크 업계와 서비스 이면’이다. 서비스가 만들어지는 개발 과정부터, 사용자들이 서비스를 사용하는 과정까지 여성은 배제되거나 착취당한다. 조경숙은 2018년부터 3년 동안 십대여성인권센터에서 IT 지원단으로 활동했다. “개발자들은 개발 이후 서비스가 어떻게 이용되는지는 잘 모른다. 내가 만든 서비스를 통해서 디지털 성착취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모니터링을 하며 알게 된 랜덤채팅 애플리케이션(앱)은 “성착취를 의도한 듯한 기능으로 가득했다.”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돈이 생겼기에, 위기 청소년이 이용하기 쉬웠다. 상대방이 메시지를 보내게 하기 위해 성적인 농담에 응수하거나 성적인 사진을 보내는 것이다. 서비스 제공사는 코인 충전 수수료를 수익으로 얻는다. 대화가 오가야 수익이 나는 구조를 만들어놓고, 대화 내용은 제재하지 않았다. “화상채팅은 고화질로 빠르게 대화할 수 있는, 기술적으로는 놀라운 사례였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성착취에 악용됐죠. 새로운 IT 서비스에는 새로운 위험성이 생기는데, 이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부족한 것 같아요.”
📌[플랫]피해자의 46%, 채팅앱 통해 성착취에 노출되는 아동·청소년
📌[플랫]‘자율적 통제’로 성착취 막겠다는 디시인사이드의 안이함
조경숙은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에서 ‘젠더 데이터 공백’을 읽어낸다. 스토킹 범죄로 신체적 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42.6%에 달하지만 구속 건수는 4.8%에 불과하다. 매년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언론 보도 사건을 수집해 친밀한 관계 남성에게 살해당한 여성의 숫자를 발표하고 있지만, 정부 차원 통계는 전무하다. 그는 “여성 대상 스토킹 범죄의 특수성을 가늠할 만한 데이터가 공백에 가깝다. 젠더 데이터는 존재하지 않아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보고되었지만 수집되지 않았기에 없는 영역”이라고 말한다.
조경숙의 아이는 초등학생이다. 임신·출산·육아 과정을 거치며 조경숙은 IT 업계에서 요구하는 과도한 노동, 끊임없는 학습과 자기개발이 어떻게 여성들을 소외시키고 배제하는지 직접 경험했다. 쉴 새 없이 등장하는 신기술 때문에 개발자들은 업무시간 이외에도 학습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신기술을 학습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뜻하는 ‘러닝커브’라는 말도 있다. “내부적으론 ‘지금 발사하는 로켓에 타고 있는 거다, 힘들 수밖에 없지만 조금만 참아라’라는 말을 많이 해요. 개발자들이 그 성장 논리에 설득돼서 건강이 상해가며 일하고 학습하죠. 저도 육아를 하면서 원하는 만큼 일의 퍼포먼스가 안 나오고, 공부할 시간도 부족하니까 내 잘못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구조의 잘못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고 자책하는 거죠.”
‘개발자’가 아닌 ‘개발진’에 주목해야 한다는 말도 흥미롭다. “여성 개발자가 부족하다”는 고정관념(사실이기도 하다)이 실제 IT 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다양한 여성 노동자들을 지워버리는 역효과를 낸다는 지적이다. 서비스 개발은 기획자, 디자이너, 프로젝트 매니저 등 다양한 구성원이 함께하는 팀워크이기 때문에 ‘개발진’이라는 말이 적합하다는 것이다. 개발진으로 인식 범위를 확대한다면 “처참한 개발자 성비보다 훨씬 더 나아질 것”이라며 “테크 산업 안의 여성들을 더 다채롭게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조경숙은 테크 업계 내의 위계구조도 지적한다. SI와 같이 유지·보수 등 시스템이 돌아가는 데 꼭 필요한 ‘돌봄노동’은 대우가 낮고 경시된다. 전산실이 지하나 에스컬레이터 밑 후미진 곳에 위치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노동’이다. 이들은 ‘러닝커브’에서도 불리한 자리에 있다. 오래된 코드를 점검하고 고치기 때문에 신기술을 학습하기가 더 힘든 것이다. “빛나는 IT보다는 잘 안 보이는 곳에서 유지·보수를 하는 분들도 IT 노동자고, 그분들이 시스템을 돌아가게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테크 기업에서 임원이 되는 것만이 성장과 성공이 아니란 말을 하고 싶었어요.”
책에선 카카오 데이터센터 화재 피해 사례에서 드러난 자영업자들에게 수수료를 걷으면서도 피해보상엔 인색한 현실, ‘네카라쿠배’ 입사가 새로운 ‘입시’가 된 현실 등 IT 업계의 다양한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 IT 업계 내·외부자, IT 기술 의존도가 커지고 있는 사회에서 모두에게 유용한 책이다.
▼ 이영경 기자 samemind@khan.kr
플랫팀 기자 areumlee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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