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튀르키예’… 에르도안은 제2의 오스만제국 꿈꾼다
● 에르도안, 경제난에도 ‘안보’ 앞세워 재집권
● 친서방 지향하던 튀르키예, 이슬람주의 강조
● 지중해, 아라비아반도 분쟁에 적극 개입
가난하지만 똑똑했고, 야망도 컸던 그는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는 정치계의 이단아였다. 1930년대부터 튀르키예 정치권은 세속주의, 온화한 이슬람, 친(親)서방(西方)을 지향해 왔다. 그는 정반대 전략으로 기존 정치권과 각을 세웠다. 그 전략은 이슬람주의, 민족주의 가치를 내세우는 것이었다. 튀르키예 보수층은 이 기린아의 손을 들어줬다. 그는 권력을 잡았고, 지금까지 잘 유지해 왔다. 자신이 계속 집권할 수 있도록 수차례 법도 바꿨다.
물론 큰 위기도 있었다. 2016년 7월 일부 군부 세력이 주도한 쿠데타 시도가 있었다. 다행히 쿠데타는 빠르게 제압됐다. 대통령선거가 예정된 올해 연초부터 악재가 겹쳤다. 수년간 이어져온 경제위기는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없었다. 예상치 못한 대지진도 발생했다. 국난이 길어지자 나라 안팎에서는 대통령이 바뀔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그는 살아남았다. 5월 28일(현지 시간) 치러진 대선 결선투표에서 무난히 승리했다. 새 대통령 임기는 2028년까지다. 그러나 조기 대선을 치른 뒤 승리하면 5년 더 집권할 수 있다. 합법적으로 최장 2033년까지 국가를 이끌게 된 것. 이는 '선거'를 통한 30년 집권을 눈앞에 둔 것을 의미한다. 올해 69세인 그의 나이를 감안하면 사실상 '종신 집권'이나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이 그를 '현대판 술탄(절대 권력자란 의미)'이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바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튀르키예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52.16%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당선됐다. 6개 야당 연합 후보로 에르도안 대통령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공화인민당(CHP) 대표는 47.84% 득표율에 그쳤다.
위기 속 헤매는 경제
현재 튀르키예 상황을 봤을 때, 에르도안 대통령의 당선은 의외다. 국민의 삶과 직결되는 '경제 성적표'가 낙제점이기 때문이다. 물가 폭등, 국민소득 추락, 낙후된 사회 인프라 등 튀르키예가 겪고 있는 경제 문제는 한 문장으로 요약하기 어려울 정도다.무엇보다 튀르키예 국민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건 '살인적'이라는 표현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물가 폭등이다. 튀르키예는 지난해 10월 소비자 물가지수가 80%나 상승하는 사태를 겪었다. 올해 역시 매달 물가 상승률은 40%대를 기록하고 있다. 최근 5년간 튀르키예 리라화 가치는 달러 대비 77%나 떨어졌다. 경제성장률도 2021년 11.4%, 지난해 5.6%, 올해 2.8%(예상)로 폭락하고 있다.
경제난에 대한 대응이 좋은 편도 아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물가상승 원인은 고금리에 있다"고 주장하며 지난해부터 올해 2월까지 금리를 5번 내렸다. 주류 경제학과는 정반대 처방이다. 적어도 경제만 놓고 보면 에르도안 대통령은 5월 14일 진행됐던 1차 대선 투표에서 크게 패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사정 속에서 자연재해도 발생했다. 올해 2월 튀르키예 남부 시리아와의 접경지역에서 규모 7.8의 강진이 발생한 것. 이로 인해 5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당시 구조 및 복구 작업은 더디게 진행됐고, 에르도안 대통령은 재난 현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렇게 큰 재난에 준비가 돼 있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해 국민의 분노를 샀다.
튀르키예는 1999년 서부의 대표 도시 중 하나인 이즈미르에서 발생한 대지진을 겪은 뒤 지진 대비를 위해 국민들로부터 '지진세'를 걷었다. AFP통신 등에 따르면 튀르키예 당국이 지금까지 걷은 지진세 규모는 880억 리라(약 6조 원) 정도다. 하지만 '지진세가 언제, 어떻게 쓰였느냐'는 튀르키예 국민들의 질문에 정부는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당연히 국민의 분노와 절망은 극에 달했다.
에르도안 무기는 '국뽕'
그럼에도 튀르키예 국민은 에르도안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과반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했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은 1차 투표에서도 49.52%의 득표율을 얻어 1위를 차지했다. 1차 투표에서 5.17%의 득표율로 3위에 오른 시난 오안 승리당 대표의 지지를 이끌어내며 결선투표에서 승리했다.경제위기 속에서도 집권 대통령이 승리한 튀르키예 대선을 놓고 많은 전문가는 '경제 어젠다'가 '안보 어젠다'에 묻혔다고 평가한다. 좀 더 직설적으로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강조해 온 '강한 튀르키예'와 '오스만제국 재건' 메시지가 그만큼 튀르키예 사회 전반에 잘 먹혀들었다는 증거라는 분석이 많다.
튀르키예 출신으로 한국으로 귀화한 언론인 알파고 시나씨 씨는 "에르도안 대통령은 오스만제국 시절 중동, 동유럽, 중앙아시아를 제패했던 화려한 과거를 상기시키며 이른바 '국뽕'을 자극하는 전략을 구사했다"며 "결과적으로 보수층 국민을 중심으로 확실한 지지 기반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튀르키예와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는 중동과 유럽 국가들, 나아가 국제사회가 이번 튀르키예 대선을 주목한 가장 큰 이유는 에르도안 정권의 지역 패권 정책에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당선될 경우 지역 패권 정책에 더욱 힘이 실릴 것이고, 직·간접적으로 더욱 많은 나라가 '튀르키예로 인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독립 외치는 쿠르드족 빌미로 시리아 공격
에르도안 대통령의 튀르키예의 지역 패권 정책으로 변화를 가장 크게 느껴온 나라는 시리아다. 시리아는 튀르키예 남부와 국경선을 길게 맞대고 있다. 2010년 12월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의 봄(아랍권의 민주화운동)'이 독재와 가난에 허덕이던 중동 국가에 한창 영향력을 발휘하던 2011년, 시리아는 내전에 빠졌다. 피비린내 나는 10년간의 전쟁 끝에 세습 독재자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반군을 제압했다. 이 과정에서 알 아사드 정권은 이란과 러시아 군대의 도움을 받았고, 반군 거점 지역을 대상으로 화학무기까지 사용했다.튀르키예는 시리아 내전 중 반군 편에 서서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2019년 10월 시리아에 주둔하던 미군이 철수를 선언하자 곧바로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족 집단 거주 지역을 공격했다. 에르도안 정권은 튀르키예 국민(약 8500만 명)의 약 20%를 차지하는 쿠르드족이 시리아, 이라크, 이란 등 주변 국가에 거주하는 쿠르드족의 '분리·독립 움직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심각한 안보 위협으로 여긴다. 이번 대선에서도 에르도안 대통령은 '쿠르드족 견제'를 주요 정책 중 하나로 내세웠다.
2019년 10월 튀르키예는 시리아 북부 쿠르드족 공격 작전명을 '평화의 샘'이라고 명명하고, 대규모 지상군을 투입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거주 지역도 공격해 어린이 사상자가 대거 발생하자 국제사회의 큰 비난을 받았다. 튀르키예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2주에 걸쳐 대대적인 공격을 진행했다. 이어 시리아 북부(튀르키예 기준으로는 남부)에 길이 444㎞, 폭 30㎞ 지역을 '안전지대(완충지대)'로 만들겠다고 발표하며 군대를 주둔시켰다. 실질적인 영토 늘리기 조치나 다름없었다.
주변국의 두려움은 극에 달했다. 반면 튀르키예 보수층 사이에선 긍정적 평가가 나왔다. 중동 외교가 관계자는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는 중동 대부분의 나라들이 튀르키예의 시리아에 대한 대규모 공격에 공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제2의 오스만제국' 꿈꾸는 튀르키예
국경을 맞대지 않은 지역으로도 튀르키예의 영향력은 확장되고 있다. 특히 지중해권, 아라비아반도, 동유럽 등에 전방위적인 패권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대표적 예로 리비아가 있다. 리비아는 지중해와 북아프리카를 잇는 지정학적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는 나라다.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량도 많다. 리비아도 아랍의 봄의 여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42년간 철권통치를 이어가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2011년 권좌에서 쫓겨났다. 독재의 끝은 내전으로 이어졌다. 리비아는 둘로 갈라졌다.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이슬람 원리주의를 강조하는 통합정부(GNA)와 동부 유전지대를 장악한 세속주의 군벌 리비아국민군(LNA)이 지금도 내전을 벌이고 있다. 튀르키예는 GNA, 사우디아라비아는 LNA의 핵심 지원국으로 꼽힌다. '아랍의 맹주' 사우디아라비아와 '오스만제국의 후예' 튀르키예가 사실상 리비아에서 대리전을 치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2017년 6월 사우디,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 이집트가 카타르의 친이란 외교, 무슬림형제단 지원 등을 문제 삼으며 터진 '카타르 단교 사태' 때도 튀르키예는 카타르 편에 섰다. 카타르 단교 사태는 단교 주도국들이 카타르와의 외교 무역, 교통, 관광 등 교류를 일시에 중단하는 초유의 사태였다. 국제사회에서 가장 끈끈한 결속력을 자랑하는 정치·경제 협의체로 꼽혀온 걸프협력회의(GCC·사우디, 카타르, UAE, 바레인, 쿠웨이트, 오만이 회원국)의 심각한 균열을 의미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2021년 1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취임 직전 단교 주도국들과 카타르 간 관계 정상화 합의가 있었지만 여전히 앙금은 남아 있다.
당시 튀르키예는 카타르 정부의 요청에 따라 군대를 카타르에 파병했다. 카타르와 튀르키예 모두 "예정돼 있던 군사 협력이다" "왕실 경호와 카타르군의 훈련을 위한 목적이 크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튀르키예군의 카타르 파병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 제1차 세계대전 뒤 오스만제국이 붕괴하면서 아라비아반도에서 철수했던 튀르키예 군대의 공식적인 첫 귀환이었다.
카타르는 단교 직후 일시적 식량 부족 사태를 겪었다. 주요 식량의 80% 정도를 사우디로부터 수입해 왔기 때문이다. 튀르키예는 식량 부족 해결을 위해 카타르를 적극 지원했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은 "사우디로서는 이미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적극적이었던 이란에 이어 튀르키예까지 자국 바로 앞에서 상대해야 한다는 부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조치였다"고 말했다.
키프로스에서도 튀르키예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다. 키프로스는 지중해의 섬나라로 지정학적 가치와 함께 천연가스와 관광자원으로 주목받는 나라다. 키프로스 남부는 그리스계, 북부는 튀르키예계가 주민 다수를 차지한다. 사실상 분단국가에 가깝다. 국제사회는 그리스계가 주를 이루는 남부 지역만 정식 국가(국가명은 키프로스)로 인정하고 있다. 튀르키예계가 주를 이루는 북키프로스는 튀르키예와 일부 친튀르키예 국가들만 정식 국가로 인정한다.
키프로스 해역에서 천연가스전이 발견되자 튀르키예는 이 지역에서 다양한 탐사 활동과 군사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장 센터장은 "키프로스 인근에서 진행 중인 튀르키예의 군사훈련이나 천연가스 탐사 작업은 '키프로스가 독점적으로 천연가스 탐사와 개발을 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2020년 9~10월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와 전쟁을 벌였다. 아제르바이잔은 중동과 동유럽에선 '튀르키예의 동생 국가'로 불릴 만큼 튀르키예와 가깝다. 반면 아르메니아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20세기 초에 발생한 오스만제국의 대학살로 인한 피해를 강조해 오며 튀르키예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두 나라의 충돌에서 튀르키예는 당연히 아제르바이잔 편을 들었다. 첨단 무인기(드론) 등을 공급하며 적극 지원했고, 그 결과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에 승리했으며 일부 아르메니아 영토를 병합할 수 있었다.
당분간 에르도안 정권의 '마이 웨이(My Way) 전략'은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실질적인 종신 집권의 기반이 마련됐고, 보수층의 결집 움직임도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튀르키예의 지역 패권 전략이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도 본격 전개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튀르키예는 2021년 11월 튀르크어 계열 언어를 쓰는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튀르크어 사용국가 기구(Organization of Turkic States·OTS)'를 결성했다. 정식 회원국은 튀르키예,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이다. 투르크메니스탄과 헝가리는 참관국이다.
나토 안에서 몽니 부리기
에르도안은 미국과 유럽을 상대로 '몽니 부리기'도 서슴지 않는다. 튀르키예는 냉전시대 구소련(현 러시아)을 견제할 목적으로 설립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의 핵심 구성원 중 하나다. 하지만 최근 수년간 에르도안 정권의 행보는 과거와는 다르다. '튀르키예가 나토 회원국이 맞느냐'는 질문이 나올 정도로 러시아와 긴밀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최근에도 나토 안에서 튀르키예의 몽니 부리기는 계속되고 있다. 나토에 가입하려는 스웨덴을 튀르키예가 가로막고 있다. 나토는 기존 회원국이 모두 동의해야만 새로운 국가가 가입할 수 있다. 중립국인 스웨덴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나토에 가입 의사를 표현했다. 튀르키예는 스웨덴이 쿠르드족 분리 운동가들을 지원한다는 이유로 '가입 반대'를 외치고 있다.
튀르키예에서 중동 역사와 이슬람 문화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는 "쿠르드족 문제와 연관돼 있어 대선 때는 스웨덴의 나토 가입 반대 목소리를 높였지만 서방과의 관계 개선도 중요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반대하진 않을 것"이라며 "다만 나토 안에서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스웨덴 가입에 동의해 주는 대가를 최대한 받아내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제위기 극복 위해 '정통 경제전문가' 중용
에르도안 대통령이 외교안보에서는 이슬람주의와 지역 패권 전략을 유지하겠지만 경제 문제는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정부의 경제 라인'이 정통 경제관료와 시장주의자로 채워지고 있기 때문이다.최근 에르도안 대통령은 개발부 장관을 지낸 세브데트 일마즈를 부통령으로 앉혔다. 경제 사령탑인 재무부 장관에는 메흐메트 심셰크 전 부총리를 임명했다. 심셰크 전 부총리는 글로벌 투자은행인 메릴린치에서 활동한 금융인 출신으로 2009년 재무장관, 2018년 부총리를 지냈다.
가장 파격적인 건 중앙은행 총재 인사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올해 41세로 미국 프린스턴대 금융공학 박사 출신이며 골드만삭스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여성 금융인 하피즈 가예 에르칸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희수 명예교수는 "경제난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인사로 보인다"며 "당분간 국내 정책은 최대한 경제전문가들의 조언을 따르면서 엉망인 경제지표를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추려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세형 채널A 기자·前 동아일보 카이로 특파원 turt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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