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기쁘다·된다 되뇌며 살아… 행복, 뻔해도 기본으로 돌아가야”[파워인터뷰]
돈만 좇는 사람들이 불행한 것
번쩍이는 車 만큼 마음 빛내야
구식같아도 ‘효자’가 되면 행복
스님·목사부터 발달장애인까지
각계 93명이 쓴 책 ‘…촌장님’
이젠 칭찬보다 ‘責善’ 해줬으면
집안 유산으로 받은 땅 기증해
장애인 일터 만들고 재활훈련
하루 서너시간은 함께 공장 일
인터뷰=장재선 전임기자 jeijei@munhwa.com
93세의 은퇴 주교는 “나이가 드니까 다리에 힘이 없어졌다”고 했다. 먼 거리를 갈 땐 지팡이를 짚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까운 거리는 스스로 걸었다. 다리를 약간 끄는 모습이긴 했으나 천천히 자신의 걸음으로 이동을 했다. 3시간여 대화를 나누는 동안 보청기를 꼈으나 허리를 꼿꼿하게 유지했다. 그는 “평생 기도하며 생긴 습관이니 자랑할 게 못 된다”고 했다.
1세기 가깝게 사는 동안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 때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별로 없다”고 했다. 그는 “도망가기 편한 답인데, 하나님이 도우셔서 그럴 것”이라며 웃었다. 김성수 대한성공회 주교. 그는 ‘어른이 없다’는 시대에 어른 역할을 하는 드문 인물로 꼽힌다. 평생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며 푸르메재단 등 사회복지단체들의 앞길을 이끌어줬다. ‘우리 시대 성자(聖者)’로까지 불리지만, 소탈하고 겸허하며 때론 익살스러운 언행으로 웅숭깊은 인간미를 풍겨왔다. 그가 후배 성직자에게 “야, 인마!”라고 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는데, 묘하게 정감이 어려 있는 음성이었다. 그의 욕설은 성직자 권위를 내려놓음으로써 상대방을 무장해제시키는 비법이라고, 그를 아는 이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인천 강화 온수리에 있는 발달장애인 재활 공동체 ‘우리마을’에서 지난달 28일 만났을 때, 작년 12월에 있었던북콘서트 이야기부터 했다.
―그날 “책선(責善)을 해 달라”고 당부하셨지요. 요즘 잘 쓰지 않는 말인데.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열린 북콘서트는 책 ‘우리 마음의 촌장님’ 출판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각계 인사 93명이 그에게 헌정한 글을 모은 책이 출간된 것과 관련, 그는 무척 민망하게 여겼다. 그날 그는 “성경에 많은 이에게 칭찬받은 사람은 불행하다고 적혀 있는데, 앞으로 저는 몹시 불행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칭찬보다 책선을 해 주셔야 내 여생이 평안할 거 같습니다”라고 했다. 책선은 착하고 좋은 일을 하라고 권유한다는 뜻이다.)
“머릿속에 늘 있던 게 그때 홱 나온 거지요. 나는 그럴 만한 일을 하지 않았는데, 주변에서 너무 칭찬하니까 부끄러워서였지요. 나를 잘 몰라서 그렇게 칭찬들을 하는 거예요. 나처럼 게으르고 머리 나쁘고 일 못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남들이 다 만들어놓은 일들을 마치 나 혼자 한 것처럼 말씀들을 하시는데, 속을 알면 그런 칭찬들이 없어질 거예요. 내게도 구린 데가 있고, 차가운 구석이 있으니까요.”
―그러면 93명이나 되는 사람이 다 속았다는 건가요.
“내가 아마 요술을 잘 부리는 거겠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을 잘해요.”(그는 조쌀한 얼굴에 장난스러운 웃음기를 함박 머금었다.)
―책에서도 드러나듯 유력 인사들과 두루 친하신데, 그걸 자랑한 적이 없다는 게 주변 사람들 이야기더군요.
“그런 게 자랑이면 자랑을 했겠지요. 오래전에 내게 어떤 사람이 (힘 있는) 누구를 잘 안다고 자랑을 했어요. 그런데 그 누구라는 사람이 나를 만나서 고개를 숙이니까, 잘 안다고 자랑을 했던 사람이 내게 깜빡 죽어요. 그런 못난 놈들이 세상에 많아요. 나도 조심해야 하겠구나, 겸손해야 하겠구나, 생각했어요.”
대한성공회를 대표하는 인물로 이름이 높은 그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역대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직접 만나기도 했다. 일화를 전해달라고 했더니 어느 대통령이라고 거명은 하지 않은 채 한 시민단체 대표들과 함께 만났던 이야기를 풀어놨다.
“그날 대통령 혼자만 계속 떠들더군요. 그래서 제가 한마디 했어요. ‘대통령께서 오늘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데, 옆에 계신 부인도 한마디 하게 하시죠.’ 그랬더니 ‘우리 집안은 유교 전통이 강해 집사람은 바깥에서 이야기를 안 합니다’라고 해요, 하하.”
―요즘도 ‘우리마을’ 일꾼들과 공장에서 함께 일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힘들지 않으셔요?
“깊숙이 들어가서 지내는 게 아니고 어영부영하니까 견디는 듯싶어요. 공장에서 하루 서너 시간씩 함께 일하지만, 사실 잘은 못하지. 가서 잔소리를 많이 하는데, 저 할아버지는 왜 자꾸 와서 망령을 부리나, 그러겠지요.”
그는 고향인 강화 온수리에서 집안 유산으로 받은 땅을 기증해 2000년 발달장애인 일터 ‘우리마을’을 설립했다. 이곳에서 생산하는 무농약 콩나물은 철저한 품질 관리를 거쳐 풀무원, 두레생협 등에 납품하고 있다. 커피박(찌꺼기)을 활용해 연필과 화분 등 친환경 제품을 만들고, 전자부품을 받아 단순 조립하는 직업재활훈련도 하고 있다. ‘우리마을’은 성공회 서울교구가 관할하며, 교구에서 파견한 사제가 원장을 맡는다.
“힘있는 사람 안다고 자랑하는 못난 놈들 보며… 나도 ‘겸손’ 되새겨”
콩나물공장 화재때 큰 위로받아
이웃들, 화재 조사하는 경찰에
너도나도 ‘우리마을’ 잘 봐달라
소방관들은 매일 119원씩 기부
‘우리마을’ 이름 덕 본거겠죠
발달장애인 양로원도 추진 중
만 65세땐 재활시설 퇴소 원칙
일반 노인시설 갈 수밖에 없어
관련법 정비해 노후 대비해줘야
현재는 원순철(57) 신부가 원장으로 애쓰고 있다. 김 주교는 1대 원장을 그만둔 후 자칭 ‘촌장’으로 함께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 ‘촌장댁 사택’이라고 적힌 표지판이 있어 미소를 머금게 한다.
―촌장이라는 이름이 좋은가요?
“일제강점기 때 태어나서 그런지 전통적으로 우리가 써 왔던 말에 매력을 느껴요. 사실 한글도 잘 모르지만.(웃음)”
―‘우리마을’이라고 한 까닭은.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우리 성공회나 모두 주기도문을 외웁니다. 거기 ‘우리’라는 말이 여섯 번 나옵니다. 세계인이 모두 우리 아버지를 외치는 셈이지요. 내가 젊었을 때 폐결핵을 10년 앓았잖아요. 그때 아무 데도 못 나가고 집에서 혼자 주기도문을 외우곤 했는데, 그때 우리라는 말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여기 발달장애인들을 소외된 이들이라고 한다면 그 말이 이상하지만, 사는 게 정말 힘든 형편인 건 사실이에요. 그러니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하는 거지요.”
―2019년에 여기 콩나물 공장이 화재로 다 불탔는데, 금세 재건을 했다면서요.
“제가 깜짝 놀랐어요. 불이 나서가 아니라 그런 일을 당한 것에 대해 어찌나 많은 분이 위로를 해 주시는지, 어휴. 그분들이 도와준 덕분에 금방 일어설 수 있었어요. 평소 손가락질받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걸 실감했지요.”
당시 ‘우리마을’의 불을 끄러 왔던 지역 소방관들은 매일 119원씩 돈을 모아 새 공장을 지으라고 기부했다. 그 소식을 들은 지역주민들은 바자회를 열어 기부금을 모았다. 인근 사찰 전등사의 주지 스님과 신도들도 동참했다. 여기 공장에 콩나물 재배기술을 전수하고 생산품을 구매해 주던 회사 풀무원도 힘을 보탰다.
“나쁜 일을 당했으니 곧 좋은 일이 올 거라고 사람들이 저를 위로했는데, 진짜로 그랬어요. 우리라서 그런 거예요. 우리 모두 겪는 일이라고 여긴 거예요.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할까요. 큰 화재가 나니까 지역 경찰서에서 이런저런 조사와 점검을 하더군요. 그 일을 맡았던 경관이 의아스럽다고 했어요. 여기저기에서 경찰서에 전화를 해서 ‘우리마을’을 잘 봐달라고 하더래요.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결같이 그러느냐, 궁금하게 여겼어요, 하하. 우리니까 그랬겠지요.”
―책을 보니 각계 명사뿐만 아니라 떡볶이 가게 주인 등 서민들도 필자로 참여했더군요. 우리마을 일꾼인 발달장애인들이 손편지를 쓴 것도 봤습니다.
“여기 선생님들(우리마을 운영 성직자와 직원)이 이렇게 저렇게 쓰라고 했겠지요.”
멀찍이 떨어져서 대화를 듣고 있던 원 신부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저희가 안 그랬어요. 본인들이 알아서 쓴 거예요”라고 했다.
―그런 편지를 받으면 감동스러우시겠어요.
“그렇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요. 우리 친구들도 여느 사람들처럼 삶의 목적이 있고 생각이 있는데 표현을 못 하거나 안 하는 거니까.”
그는 지난 2015년부터 발달장애 노인 전문시설, 즉 양로원을 추진해왔다. 장애인이 만 65세가 되면 ‘우리마을’과 같은 재활시설에서 나가야 하는 탓에 그 이후를 대비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라가 그걸 못하게 합니다. 지방자치단체에서 30명 정도 규모로 하라는데, 현실에 맞지 않아요. 그런 규모로 하려면 많이 만들어야 하는데 그때마다 지역민 반대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원 신부는 이와 관련, “문재인 정부 때 장애인 ‘탈시설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어 30인 이상 시설은 허가하지 않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시설을 벗어나 지역에서 케어하는 데 중점을 둔 탈시설 정책은 이상적이지만, 우리나라 장애인 인식이 따라오지 못하니 현실과 괴리가 있다”고 했다.
‘우리마을’은 장애인 기능보강사업 명목으로 30인 노인시설을 정부에 신청해놨다. 허가가 나면 40억∼50억 원의 건설 예산 중 공적 기금으로 최대 12억 원 정도를 지원받을 수 있다. 그 밖의 자금은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설립 초기엔 자비로 운영해야 하는 규정이 있어 연 예산 10억 원도 추가로 준비해야 한다.
시설 허가가 나지 않으면, 현재 2개를 운영하고 있는 그룹홈 형태로 꾸려갈 계획이다. 그 경우, 그룹홈 교사들이 하루에 8시간 근무하는 법 규정을 넘어 변칙적으로 근무하며 혹사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크다. 발달장애인 노인들을 사실상 하루 종일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원 신부는 “현행 법제상 장애인이 늙으면 그냥 노인요양시설로 들어가게 돼 있다”며 “관련법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부연했다. 김 주교는 이렇게 탄식했다.
“발달장애인 노인요양법을 별도로 만들든지, 기존 법에 관련 내용을 첨가하든지 해야 해요. 그런데 의원들이 관심이 없어요. 표가 생기는 일이 아니니까. 아이, 속상해요.”
―좋은 이야기 할까요? 책 맨 앞에 전등사 회주 스님, 대한감리회 전 감독회장 목사의 글이 있는 게 인상적이더군요. 종교 화합에 힘쓰신 덕분이겠지요?
“아니, 내가 힘써서는 아니에요. 다른 동네는 어떤지 모르지만, 강화도는 잘들 하고 있어요. 내가 강원도 백담사에서 주는 걸(만해대상) 받을 때 전등사 장윤 스님이 왔어요. ‘신부님, 상 받은 거 축하합니다. 강원도 구경 좀 하죠’라며 오대산 높은 곳도 보여주고, 스님들이 해 준 국수도 먹게 해 줬어요. 내가 일생에 비구니 스님들이 해 준 음식을 어떻게 먹겠어요. 참 고마웠어요. 그래서 매년 부처님오신날에 전등사에 가서 축하해드리지요. 감리교회와도 가깝게 지냅니다. 강화도에 성공회 성당은 12개인데, 감리교회는 100여 개에 달합니다. 절친하게 지내서 손해날 것 없지요.(웃음) 인사를 먼저 하면 됩니다. 물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살면 돼요.”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이 생각나네요. 송월주 스님, 강원용 목사와 함께 사회운동을 하셨지요.
“맞아요. 김 추기경은 우리 성공회 이천환 주교와도 친했지요. 종교 벽을 허물고 화합하려고 애쓰셨어요.”
이천환 주교는 대한성공회 최초의 한국인 주교로, 1965년 서울교구장에 올랐다. 김 주교는 그 뒤를 이어 1984년 2대 교구장이 된 후 1995년까지 봉직했다. 대한성공회의 자립 기틀을 세우는 한편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위한 ‘나눔의집’을 전국 각지에 설립하고 봉사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약자를 부축한다는 점에서 주교님 행보가 김 추기경님을 닮은 듯합니다.
“(그분의 삶을) 본 놈이 닮아야지, 안 닮아서 되겠어요. 추기경께서 스스로 바보라고 했는데, 나도 똑같이 그랬어요. 그런데 나는 바보 취급을 안 하더라고요. 한 번은 자살예방 캠페인을 함께 하며 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 주는데, 모두 추기경에게서만 받아 가고 나에겐 안 왔어요, 하하. 그분은 정말 큰 지도자였습니다. 종교계에서 그런 분이 또 나와야 할 텐데….”
―주교 이전인 1974년부터 한국 최초 발달장애인 특수학교인 성베드로학교 교장을 맡는 등 평생 소외된 이들 곁에서 지내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직자라는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아마 폐결핵으로 고생하며 외롭고 슬픈 것을 겪어서가 아닐까요. 그건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마음대로 나가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젊었을 때 우리나라 농촌에 가 본 적이 있는데, 너무도 가난해서 참 비참하게 살더군요. 그게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우리나라도 경제적으로 선진국에 진입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불행하다고들 하는 걸까요.
“온 국민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인데, 내 짧은 소견에는 너무 돈만 생각해서들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길거리에 나가면 번쩍거리는 차가 많은 시대가 됐는데, 사람들이 마음도 그만큼 빛나도록 닦았으면 해요. 모두 변해야 해요. 한두 사람이 변해서 될 일은 아니고 두고두고 함께 풀어가야 합니다.”
―어떤 방향으로 변화해야 합니까.
“거기에 답을 하려면 내가 구식으로 돌아가는데, 효자면 될 것 같아요. 자식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효도하고 부모는 존경받을 일을 하면 됩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예요.”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에 불행감이 커진다고 하는데….
“유치원에서부터 바뀌어야 해요. 좋은 유치원, 나쁜 유치원 하며 부모들이 너무 돈들을 써요. 옛날에도 그러긴 했지만, 지금은 너무 비교들을 해서 아이들을 버리는 것 같아요.”
―지금 한국 정치는 진영 싸움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데, 어떻게 보고 계신지요.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답하던 그가 이 대목에서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싸움을 하는 분 중 기독교, 불교인을 포함해 종교인들이 상당수 있을 거 아니에요?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용서하고 껴안으면 될 텐데, 그게 안 되고 있어요. 진심으로 나라를 위하는 책임감이 없기 때문일 거예요. 정치를 몰라서 건방진 소리를 하는 것이겠지만….”
―1987년 6월 10일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4·13호헌 철폐를 위한 미사’를 집전하시며 당시 시위 시민들을 보호하셨습니다. 민주화 운동에 기여하셨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신부들의 과격한 행동은 절제를 당부하셨다더군요.
“내가 민주화운동에 기여했다는 것은 교회 조직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모두 신부님들이 저질러 놓은 일이지요. (시위 시민을) 몰고 들어온 것을 주교가 어떻게 내쫓나요. 주교는 같이 일하는 신부들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니, 당연히 미사를 봐야 해요. 내쫓는다고 가겠어요. 함께 있으면서 조용히 미사를 드려야지. 그게 교회지요. 그리고 (신부들의 행동이) 과격하거나 미온적일 때는 서로 이야기해서 좋은 쪽은 어디인가 찾았어요. 그렇게 하면 해결이 돼요.”
―21세기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가 됐으면 하나요.
“가난하건 부자건, 병이 있든 없든 함께 사는 나라가 됐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따뜻한 손을 내밀면 모든 게 해결됩니다.”
―더 하실 말씀은.
“다 시건방진 소리지, 뭐.”
사제 서품받고 5년후 영국인과 결혼… 땅 기부땐 자녀에게도 안 알려
■ 김성수 주교는
1930년 강화도에서 태어난 김성수 주교는 “부모님께 불효한 게 지금도 죄송하다”고 했다. 장남으로서 부모 뜻에 반해 성직자가 돼서 그런가 보다 했더니 뜻밖에도 “남동생과 여동생은 공부를 잘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때 경성(서울)에서 과외를 시켜줄 정도로 부모의 교육열이 높았는데, 자신은 배재학교 시절에 아이스하키와 농구 등 운동에 관심이 많아 공부를 게을리했다는 것이다.
고교 때 폐결핵에 걸려 오랫동안 요양을 해야 했던 그는 건강을 회복한 후 연세대 신과대학 성미가엘신학원에 입학한다. 당시 그를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랐던 오 카타리나 수녀(대한성공회 성가수도회)는 그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우리 조상들이 부르주아 역을 오래 했으니 농민들이 많이 힘들었을 거야. 보상하는 의미에서라도 성직자가 되려는 거지.”
1964년 성공회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5년 후 39세에 영국 여성(후리다 릴리안)과 결혼을 했다. 16세기 잉글랜드 종교개혁에서 시작한 성공회는 사제가 결혼을 택할 수 있다. “1960년대 말 젊은이들에게 전도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 일본 성공회에 갔는데, 거기서 영국 여성이 청년 선교부장인가를 하더군요. 저런 친구가 한국에 오면 득이 되겠다는 생각에 말을 걸었어요. 내가 자꾸 그러니 싫어하는 기색이었지만, 그러나 마나 우리에게 도움이 되면 해야지(웃음).”
그런 인연을 계기로 결혼해서 살면서 그는 바깥 일에 몰두하느라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아들이 “아빠, 우리 집이 여관이야?”라고 했을 정도다. 바깥 일은 대부분 ‘약한 사람 거들기’였다. 이주노동자 희망터를 운영하는 이정호 신부 등 후배 사제들이 사표로 삼는 까닭이다.
성공회대 총장 시절엔 판공비를 받지 않고 월급으로 어려운 학생들을 도왔다고 한다. “거기엔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있어요. 어렸을 때 성공회 신자였던 김승연 한화 회장이 판공비를 줬어요. 그러니 대학에서 받을 일이 없지요, 하하.”
그는 주교에서 은퇴한 후 ‘우리마을’을 짓기 위해 집안 땅을 기부할 때 두 자녀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야 내가 너무했구나, 싶어서 땅을 조금 떼어줬지요.”
김 주교는 딸 빛나(52) 씨가 운영하는 카페 ‘놀라몬드(nolamond)’에서 기자에게 덕담을 쓰고 서명을 해달라며 종이를 내밀었다. 영락없는 딸 바보였다. 아들 용이(53) 씨는 대학교수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그만두고 여러 일을 하다가 지금은 무역회사 상무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김 주교는 스스로 “여느 노인과 마찬가지로 온갖 질환을 앓는 종합병원”이라고 했지만, 세 시간 대화를 나누고도 더 있다가 가라며 붙들었다. 건강을 위해 아무 운동도 하지 않는다는 그는 “하나님과 부모님이 주신 대로 살며 ‘좋다, 좋다’ ‘기쁘다, 기쁘다’ ‘된다, 된다’를 늘 되뇐다”고 했다.
윤형주 등 쎄시봉 멤버들과 친분… 윤여정은 “난 주교님 양딸” 자처하며 의지
■ 김 주교의 각별한 인연
“모두가 힘들었던 시대에
밥 세 끼 챙겨준 것일 뿐”
‘조영남, 윤여정, 송창식, 이장희, 윤형주에 가끔 인천이 고향인 박상규 형도 어울렸다. 우리는 신부님 방에 있는 냉장고를 뒤져 온갖 음식을 모조리 털어먹었다. 우리가 먹을 것을 싸 들고 오지 않는 것을 알고 계신 신부님은 미리 냉장고에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을 채워 두셨다.’
가수 윤형주 씨가 책 ‘우리 마음의 촌장님’에 쓴 글의 일부다. 윤 씨는 출판기념 북콘서트에 참석해 “1960년대 말 김성수 주교님이 인천성공회 성당 신부로 계실 때 매주 토요일마다 우리 쎄시봉 멤버들이 쳐들어갔다”며 “성경 용어로 하면 신부님 집을 침노한 것”이라고 했다. 당시 젊은 신부였던 김 주교는 배재학교 동창인 방송사 PD를 따라 쎄시봉에 갔다가 멤버들과 친해졌다고 한다. 윤 씨는 “멤버들이 신부님 방에서 밤새 노래하고 떠들다 잠들어 이튿날 미사에 아무도 참석하지 않아도 아무 말씀이 없었다”고 했다.
김 주교에게 그때의 일을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미사에 참석하라고 했으면 과연 했을까. 안 될 일은 하지 말아야지. 마음에 부담을 줄 필요 없어요. 형주가 원하는 것이 나도 원하는 것이니.”
윤 씨 회고에 의하면, 독실한 개신교 집안에서 자란 그가 신앙적 회의로 성공회로 옮기겠다는 의향을 밝히자, 김 주교는 “한 가정 신앙은 가족 모두 일치되는 것이 성경적”이라며 말렸다고 한다.
작년 말 북콘서트는 글로벌 스타인 배우 윤여정 씨가 펑펑 울어서 화제가 됐다. 그는 “주교님과 제가 모두 늙은 것이 너무 속상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제가 주교님 양딸”이라며 “오래 살아 주세요”라고 했다. 그러자 김 주교가 “너나 오래 살아라” 해서 참석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윤 씨는 6·25 전쟁 때 고향 개성에서 어머니, 두 여동생과 월남한 탓에 아버지 품을 모르고 성장했다. 그래서 김 주교가 수양딸처럼 여기며 사랑을 준 것이다.
김 주교는 “여정이가 착해서 눈물이 많다”며 “나는 그저 모두 힘들었던 시대에 밥 세 끼 준 것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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