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honey]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 나가사키현 히라도
(히라도<日나가사키현>=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한국은 서구식 근대화에서 왜 일본에 뒤졌나. 역사학자와 정치 지도자들의 숱한 분석과 설명이 명쾌하게 와닿지 않는다면 일본 나가사키현에서 의문을 푸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가사키현은 일본과 서양이 처음 접촉하고 교류한 무대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어떻게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제국주의 열강이 아시아, 아프리카를 침탈했던 19세기보다 훨씬 이전인 1500년대로 그 교류의 시기는 거슬러 올라간다.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가사키현은 한국에 각별한 의미를 띤다.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일본 땅인 쓰시마섬은 행정구역상 나가사키현에 속해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성지 12곳을 비롯해 나가사키현에는 세계적인 천주교 순교 성지가 많아 한국 천주교도의 순례 행렬이 끊이지 않는다.
나가사키시(市)는 막부(12∼19세기에 일본을 통치한 무사 정부)가 서양과의 무역을 금지했던 1641년부터 일본이 개항한 1854년까지 약 200년 동안 서구를 향해 열려 있었던, 오직 하나의 창이었다. 일본 전역을 통틀어 단 하나의 서양 무역관이었던 네덜란드상관이 나가사키시 데지마에 설치돼 있었기 때문이다.
천주교 선교에 열심이었던 포르투갈, 스페인 등과 달리 신교도 국가였던 네덜란드는 종교와 무역을 철저히 분리해 선교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서양 국가 중 유일하게 무역을 허락받았다. 일본이 네덜란드와의 무역을 통해 서양의 신기술과 학문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는지는 난학(蘭學)이 꽃을 피우고, 이후 일본의 무기, 의료 기술 등이 눈부시게 발전한 데서 엿볼 수 있다.
네덜란드에서 전래한 신문물을 연구하는 학문을 일본은 난학이라고 불렀다. 일본은 네덜란드와의 교역 경험을 소중히 여겨 20세기 말에 나가사키현 사세보에 수백억 원을 들여 네덜란드를 테마로 한 리조트 공원인 하우스텐보스를 건설했다. 이런 인연으로 나가사키시는 여느 도시보다 개방적이고 국제적이다. 서양인과 결혼했다가 파국으로 치닫는 일본 여성을 그린 G.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무대도 나가사키시였다.
일본 최초의 해외 무역항…히라도
'서양으로 열린 창' 나가사키시보다 앞선 일본-서양 간 무역 거점이 히라도(平戶)였다. 나가사키현의 서쪽 끝 섬인 히라도에 1550년 포르투갈 배가 닿았다. 일본에 최초로 입항한 서양 배였다. 히라도 영주 마쓰우라 다카노부는 무역이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알고 포르투갈에 천주교 선교를 허락하고 서양과의 무역을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무역의 조건으로 선교 허용을 내걸었었다.
히라도는 일약 무역의 중심지이자, 일본 최상의 항구로 떠올랐다. 히라도에는 1551년 천주교회가 건설됐고, 1609년에 네덜란드상관, 1612년에 영국상관이 차례로 설치된다. 1616년에는 네덜란드, 영국과의 무역이 히라도와 나가사키시로 한정된다.
일본은 네덜란드 무역선을 통해 주로 중국산 견직물, 동남아산 피혁류 등을 수입했고, 네덜란드는 그 대가로 은을 받아 갔다. 당시 일본은 은 제련술이 발달해 대량의 은을 생산했고 이것은 유럽 국가들에 큰 매력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이 사용했던 은 제련술이 조선에서 개발됐다는 점이다. 조선은 은 제련술을 발견하고도, 사대부의 사치 방지를 이유로 생산을 억제해 은 생산량이 많지 않았다.
조총도 이 시기에 일본으로 수입됐다. 일본 전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전국시대에 군사력이 절실했던 지방 영주들은 조총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앞다투어 서양과 무역에 나섰고, 일본으로 수입된 조총 기술은 크게 발전해 임진왜란 때 위력을 발휘한다.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것도 조총 덕분이었다. 조선에도 임진왜란 전에 일본 사신이나 쓰시마 도주의 선물 형태로 조총이 들어왔지만 조정과 지도층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천주교 신도 증가로 체제 위협을 느낀 막부는 1614년 천주교를 금지하는 금교령을 내린다. 1641년에는 히라도의 네덜란드상관을 폐쇄하고 나가사키로 이전했다. 히라도가 포르투갈과 접촉한 지 약 100년 만이고, 네덜란드상관이 히라도에 설치된 지 33년 만이었다.
중국 마카오,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서쪽으로 열린 바닷가 옛터에 큰 석조 창고 형식의 서양식 건물인 네덜란드상관이 복원돼 있다. 일본 최초의 서양식 건축인 네덜란드상관은 시대를 넘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히라도성을 올려다보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이 된 천주교 순교 성지
일본에 천주교를 처음 전한 인물은 '동양의 사도'로 불리는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신부이다. 스페인 출신인 하비에르 신부는 1549년 가고시마에 상륙했다가 1550년 히라도에 포르투갈 배가 입항했다는 소식을 듣고 히라도로 가 영주의 허락 아래 선교를 시작했다. 그가 20여일 만에 100여 명에게 세례를 준 열정적인 선교는 유명한 일화로 회자한다.
그를 기리기 위해 히라도에는 성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기념 성당이 세워져 있다. 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불교 사원이 있다. 두 성소가 어우러진 모습은 관광객들로부터 무척 사랑받는다.
1578년 신부 추방령에 이어 금교령이 내려졌을 때 나가사키 지역은 큰 희생을 치렀다. 고문 끝에 많은 신도가 처형당했으며 남은 천주교도들은 숨어서 신앙을 이어갔다. 그들은 신앙을 숨기기 위해 불교나 신도 신자로 가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숨어서 신앙을 지켰던 천주교도들을 '잠복 기리스탄'이라고 부른다. '기리스탄' 명칭은 그리스도교를 뜻하는 포르투갈어에서 유래했다.
기리스탄은 교회와 선교사가 부재한 가운데 신앙을 이어가기 위해 산이나 섬을 성지와 순교지로 숭상하고, 불상처럼 만든 마리아 상, 불상 속에 은밀히 새긴 십자가 등을 신앙의 도구로 대용하기도 했다. 잠복 기리스탄의 신앙은 1873년 금교 정책이 철폐될 때까지 2세기가량 전승된다.
히라도의 가스가 취락, 야스만다케 산, 나카에노시마 섬, 나가사키시의 오우라 천주당 등 나가사키와 아마쿠사 지방의 잠복 기리스탄 관련 유산 12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12곳을 잇는 순례길은 총 35개 구간, 465㎞에 달한다. 기리스탄이 숨어서 살았던 산골 마을인 가스가 취락, 신도 40여 명이 처형된 뒤 잠복 기리스탄의 최고 성지로 추앙받는 나카에노시마, 하비에르 성당에는 한국 천주교도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에서 섬의 밀도가 가장 높은 구주쿠시마
자위대와 미군 기지가 있는 군항 도시로 유명한 사세보시에서 히라도시까지 약 25㎞에 이르는 해안은 '구십구도'(九十九島 구주쿠시마)라고 불리는 다도해다. 서해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이곳은 일본에서 섬 밀도가 가장 높다. '99'는 '많음'을 의미할 뿐, 실제 섬의 수는 208개에 이른다. 20여 개의 크고 작은 섬 사이를 요리조리 운항하는 유람선 '펄 퀸'을 구주쿠시마 펄 시 리조트에서 탈 수 있다.
히라도 서북단에 있는 이키쓰키 섬 해안에는 높이 20m의 화산성주상절리가 남북으로 약 500m에 걸쳐 장대하게 늘어서 있다. 히라도에 있는 가와치 고개는 나가사키현을 대표하는 초원이다. 해발 200m 정도에 펼쳐진 약 30㏊의 초원에 규슈 올레 히라도 코스가 조성돼 있다.
경제 규모 세계 3위, 군사력 5∼8위, 독자적인 고유문화를 보유한 선진국으로 일본이 자리를 굳힌 배경은 19세기 말 근대화를 위해 추진했던 메이지유신의 성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대적인 정치, 사회 변혁을 초래해 혁명에 비견되는 메이지유신은 어느 날 불쑥 튀어나오지 않았다.
서양 과학, 기술, 제도의 효용과 가치를 판단하는 안목은 개혁을 성공으로 이끈 원동력이었고, 그 식견은 오래전부터 서양과 교류한 결과 형성됐을 것이다. 다행히 한국은 뒤늦게나마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제국주의 노선을 걷지 않은 비(非)서구 국가가 현재 선진국이 된 사례로 유일하다. 열린 마음, 밝은 눈으로 세상 돌아가는 일, 다시 말해 국제정세에 쏟는 관심을 늦추지 말아야겠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3년 7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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