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제주도우다』 현기영 “해방 공간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제주 청년들의 이야기”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운명적으로 쓰게 됐다고 얘기를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혼이 제대로 안 돼서 저승에 가지 못하고 허공을 떠돌고 있는 3만의 원혼들이 저를 추동시켰다고 생각해요. 캄캄한 방 속에서 압도적인 크기의 코끼리를 더듬거리는 시간이었어요. 1948년 겨울 군경 토벌대가 한라산을 에워싸고 토벌을 벌일 때 동굴에 숨은 양민들이 빛도 들어오지 않는 캄캄한 동굴 속에서 출구를 향해 더듬으며 나가는 듯한 암중모색의 4년이었지요. 그렇다고 힘들게 쓰진 않았어요. 그동안 중단편들을 썼으니, 장편을 제대로 써서 3만 원혼들에게 공물(貢物)로 바치고 싶었습니다.”
원로 소설가 현기영(82)이 긴 호흡으로 제주 4·3을 정면으로 다룬 장편소설 『제주도우다』(전3권·창비)를 들고 돌아왔다. 4년에 걸쳐서 200자 원고지 3500장에 담아낸 노작. 일제강점기 말기부터 해방공간과 4·3에 이르기까지 제주도 젊은이들의 수난과 항쟁, 그리고 빛나는 열정과 사랑을 담아냈다. 「순이 삼촌」을 발표한 이후 무려 45년 만이다.
소설 『제주도우다』는 영미와 창근 부부가 4·3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서 영미 할아버지 안창세를 설득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창세는 영미와 창근 부부의 끈질긴 설득에 의해서 마침내 입을 열고, 제주 조천을 배경으로 1943년부터 해방 공간을 거쳐서 4·3 발발과 토벌이 벌어진 1948년 겨울의 역사 현장으로 안내한다. 그곳에는 무정부주의와 민주주의, 공산주의, 우파 민족주의 등 다양한 사상적 경향을 가진 제주 청년들이 약동하고 있었다. 새 나라 새 사회 건설에 대한 낙관주의적 열정으로.
“난 장발이 성님의 무정부주의가 마음에 들어. ‘우리는 북조선도, 남조선도 아니고 제주도다’라는 말이 난 좋아. 작년에 삼팔선이 그어진 직후에 일본에서 귀향민이 들어올 때 맥아더 사령부가 물었주, 남과 북 중에 어느 쪽으로 가겠느냐고. 그때 우리 제주 백성들은 이렇게 대답했주. ‘우리는 북조선도 남조선도 아니고 제주도다!’⋯ 예예, 맞수다. 우린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니고 제주도우다!”(2권 164~172쪽)
제주 4·3을 문학을 통해서 처음 광장으로 이끌어냈던 현기영은 왜 또다시 4·3을, 그것도 대하소설로 써야 했을까. 이번 장편 속의 4·3과 제주 사람들의 모습은 이전 작품의 그것과 어떻게 다를까. 현기영을 지난달 29일 서울 서교동 창비빌딩에서 기자간담회로 만났다.
―다시 4·3이다. 우리는 왜 제주 4·3을 다시 직시해야 하는가.
“이번에 70여 년 전 이야기를 썼는데, 출판사에서 역사소설이라고 했더라. 역사소설이 아니라 현대소설이다. 왜냐하면 제주 4·3은 아직도 대한민국 공식 역사에 편입되지 못한 당대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해방 공간에서 한반도의 정치적 경제적 모순이 아주 집약적으로 나타난 게 4·3이었다. 4·3을 통해서 해방공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고, 한국전쟁 안팎에 양민학살이 어떻게 일어났으며, 당시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되돌아볼 수 있다. 역사책은 4·3 때 3만 명의 인명피해가 있었다는 사실만 기록하지만 시대정신을 비롯해 의미 있는 질문은 없다. 하지만 소설은 통계숫자를 떠나서 3만개의 사건과 죽은 3만 명 개개인을 다시 살려낼 수 있다. 그들에게 피와 살과 뼈를 부여해 그 사건의 진상을 드러낸다. 그것이 바로 역사와 소설의 차이다.”
―집필 과정에서 고민이 깊었거나 힘들었던 순간은.
“4·3을 다룬 이전 작품들은 희생담론, 수난 이야기를 많이 다뤘다. 3만이나 되는 양민들이 희생되는 수난은 항쟁과 표리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전과 달리 항쟁 부분도 수난과 함께 다루었다. 해방공간 3년 동안 새 나라를 세우려는 제주 젊은이들의 피 끓는 열정과 열광을 탐구하는 한편, 그들의 로맨스, 연애도 함께 넣었다. 소설의 전략이 아니라 실제 당시 젊은이들의 삶이 그랬다. 참혹한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고, 제주 젊은이들의 기쁨과 낭만도 함께 담겨 있다.”
―독자들이 주목해 봤으면 하는 부분이나 장면이 있다면.
“동굴에서처럼 더듬으면서 천천히 썼다. 경쾌한 소설을 좋아하면 읽기 힘들 수도 있겠다. 주제도 괴롭고, 문체도 좀 탐구적이다. 그렇지만 고심해 쓴 문장이기 때문에 천천히 읽어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
이와 관련, 그는 「작가의 말」에서도 천천히 읽어달라고 거듭 당부했다. “독자여, 그대가 이 소설을 읽기로 작심하였다면 그 길은 작가와 동행해 너무도 낯선 삶과 죽음의 비경을 찾아 가는 여행길이 될 것입니다. 작가는 이것저것 살피면서 그 먼 길을 느리게 걸어갈 텐데, 독자도 그 느린 행보의 리듬에 맞춰 천천히 걸어가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3권 363쪽)
기자간담회에선 작품의 배경이 되는 4·3을 둘러싼 질문도 적지 않게 나왔다. 4·3의 성격이나 재평가론, 김달삼을 비롯한 소장파의 무장봉기론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태영호의 ‘김일성 지시설’ 논란까지.
―지난해 국회의원 태영호가 ‘제주 4·3은 북한 김일성의 지시로 촉발됐다’는 주장을 펴서 큰 논란이 빚기도 했다.
“그야말로 역사 왜곡, 진실 왜곡이다. 당시 검찰총장조차 4·3은 제주도민이 궁지에 몰려서 일어난 것으로, 마치 궁지에 몰린 쥐가 돌아서서 고양이를 문 격이라고 이야기했다. 어떤 우익 인사도 곪을 대로 곪은 게 터진 것이라고 했다. 4·3이 터지기 1년 전에 평화로운 시위에 총격을 가해서 6명이 죽었고 3명의 젊은이가 또 고문치사를 당했다. 4·3은 단독 정부 반대라는 명분이 합쳐진 것일 뿐, 앉아서 죽는 것보다 서서 싸우다 죽겠다는 젊은이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백선엽조차 제주도 단독 행위라고 했고, 북한과 연계된 조총련조차 한때 4·3을 잘못된 행위라고 평가 절하했는데, 무슨 김일성 지령 운운인가. 나중에 민주화운동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4·3이 조명되니까 거기에 편승해 북에서 날조해 자신들이 시켰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김일성 지령설은 완전한 거짓말이다.”
―김달삼을 비롯한 남로당 제주도당 소장파의 4·3 무장봉기가 좌익 맹동주의라는 비판도 나오는데.
“4·3을 무장봉기로 보느냐 마느냐 하지만, 미국이나 미군정을 상대로 봉기한 게 아니었다. 그 정도 수준의 저항은 4·3 이전에 육지에서도 빈번하게 있었다. 일본 놈들이 버리고 간 구식총 스무 개를 가지고 이길 수 있는 싸움이라고 봉기한 게 아니다. 너무 억울해서 그냥 앉아서 죽는 것보다 싸우다 죽자는 것이었다. 제주도당 온건파 선배들은 무장봉기해선 안 된다고 말렸는데, 20대 젊은이들은 분을 참지 못한 것이다. 물론 통일 정부를 지향해 단독선거 반대 같은 것도 있었고.”
―4·3은 젊은이들이 주도한 젊은이 중심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젊은이들이 주도한 사건이다. 지도부와 산군, 게릴라의 다수는 김달삼을 비롯해 젊은 20대였고, 30대 이상은 온건파로 소장파의 무장투쟁을 말렸다. 나머지는 그들의 가족이나 친척이었고, 양민들이었다. 열광적으로 새 시대 새 국가를 갈망했던 젊은이들이 떼춤을 추고 떼창 속에서 사랑하고 싸웠다.”
―4·3이 공식 역사가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4·3의 주제는 인간의 문제다. 3만 명이라는 희생자 숫자는 단순 통계 숫자가 아니다. 한 명 한 명 하늘에 내려주신 생명이었다. 국가는 국민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데, 국가가 국민을 학살하고 파괴해 버린다면 도대체 국가는 무엇인가를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4·3은 문학의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 후배 한강도 4·3에 도전해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라는 좋은 작품을 발표했다.”
어린 시절, 말을 많이 더듬었다. 겨우 일곱 살에 불과하던 1948년, 핏빛 가득한 4·3을 경험한 탓이었다. 이모부 세 명이 모두 희생되는 등 상당수 외가와 일가친척이 희생됐다. 그의 고향 노형리의 주민 수백 명도 목숨을 잃었고. 트라우마를 겪으며 말을 더듬게 됐다.
문학을 하리라. 중학교 2학년 시절, 그는 문학을 하기로 결심했다. 소통의 무기는 최우선적으로 말인데, 말더듬 때문에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백일장에서 상도 탔다. 이때부터 말 대신 글을 단련했다. 글 쓰는 외의 다른 삶을 생각하지 않았다. 글로 사회에 나가리라. 소설가 현기영의 원점이었다.
1941년 제주 노형리에서 나고 자란 현기영은 1975년 단편소설 「아버지」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등단 이후 소설집 『순이삼촌』, 『아스팔트』, 『마지막 테우리』 등을, 장편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 『바람타는 섬』, 『누란』 등을 펴냈다. 만해문학상, 오영수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사단법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등을 역임했다.
“그렇다.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30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의 우여곡절한 유예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었다.”
1978년, 그는 제주 북촌리 사건을 모티브로 단편소설 「순이 삼촌」을 창비에 발표했다가 4·3과 운명처럼 엮이게 됐다. 소설은 30년 뒤 마을 전체가 제사를 지내는 날, 모처럼 고향을 방문한 화자가 순이 삼촌의 부고를 듣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다. 4·3을 광장으로 끌어낸 작품으로 평가받았지만, 이듬해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책은 금서로 지정되는 등 필화에 휩싸였다.
―「순이삼촌」으로 운명을 바뀌었는데. 오페라 「순이 삼촌」의 현황은.
“세종문화회관에서도 공연됐고, 제주도에서도 여러 번 무대에 올랐다. 부산에서도 8월에 올라갈 예정이고, 일본으로 갈 준비도 하는 중이다. 4·3은 제주에 국한된 풍토병이 아니다. 가해자는 육지 중앙에서 왔는데, 어떻게 제주에 국한될 수 있는가. 이 사건은 전국이 알아야 된다는 의미에서 전국화가 필요하고, 미국이 개입돼 있기 때문에 일본은 물론 미국까지 진출해 세계화가 돼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4·3이 진상 규명이 되고 대한민국 공식 역사에 제대로 올라가는 게 중요하다.”
―앞으로 작품 활동 계획은.
“나로서는 길게 썼다. 4년에 걸쳐 썼으니까. 앞으로 4·3은 쓰지 않을 생각이다. 소설을 다 쓴지 4개월이 지났는데, 지금 다른 것을 준비하고 있다. 나무에 대해 쓸 생각이다. 도시의 회색 공간에서 살다보니 인간이 자연의 소산,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잊어버린다.”
흰머리가 자연스러운 팔순의 현기영은 이날 질문을 자주 되물었다. 특히 두 세 개의 질문이 이어지면 앞 질문을 잊어먹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유독 그의 눈이 반짝거릴 때가 있었으니. 그건 해방 공간 제주 청년들의 삶과 죽음, 사랑과 좌절을 이야기하던 순간이었다.
기자간담회 어느 순간, 그의 마음은 눈이 많이 내렸던 그해 겨울 억새밭에 가려진 동굴 속으로 천천히 들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두 젊은이 대림과 두길이 나란히 누워서 맞는 죽음을 찬찬히 바라보고 있을 지도.
“우리는 죽지만 다시 태어날 거다. 대지의 자궁은 죽음 속에서 새 생명을 잉태하니까. 모든 것이 불에 타고 모든 사람이 죽었지만, 그러나 어머니 대지는 죽은 자식들을 끌어안을 거여. 땅속 혈맥들이 고동치는 소리가 지금 내 귀에 들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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