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 프로 원조는 557년 전 임금이 연 조선판 ‘전국노래자랑’[이기환의 Hi-story](90)
국내 최장수 프로그램이 뭔 줄 아시죠. 1980년 11월 정규 편성된 KBS <전국노래자랑>입니다. <전국노래자랑>은 ‘최장수’ 타이틀도 갖고 있지만 이른바 ‘시민 참여형 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조라 할 수 있는데요.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오디션 프로그램’의 비조(鼻祖)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557년 전 전국노래자랑 1466년(세조 12) 윤3월 14일자 <세조실록>을 볼까요. 세조는 중창된 평창 상원사의 낙성식에 참석할 겸 금강산을 비롯한 강원도 지역을 방문하고 있었는데요. 강릉에 거동한 세조가 아주 특별한 영을 내립니다.
“농가를 잘 부르는 농민들을 모아 장막 안에서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는 겁니다. <세조실록>은 이때의 경연에서 1등을 차지한 자는 강원도 양양의 관노 ‘동구리’였다고 전했습니다.
국왕이 주최하고, 직접 관람했으며, 점수까지 매긴 명실상부한 ‘제1회 전국노래자랑’이 펼쳐진 겁니다.
“(경연 우승자인) 동구리에게 임금이 친히 아침·저녁 식사를 제공하는 한편 악공의 예로 왕의 행차를 따르게 했다. 그에게 저고리 1령을 내려주었다.”
관노 출신의 가수(동구리)가 임금이 하사한 아침·저녁 밥상은 물론 저고리 1령까지 받았다니 얼마나 대단한 파격입니까. 물론 동구리의 가장 큰 특전은 악공의 예, 즉 궁중가수로 발탁돼 임금을 수행했다는 겁니다.
지금 <전국노래자랑>이 43년째 최장수 프로그램이라죠. 하지만 알고 보니 557년 전, 즉 1466년 윤3월 14일 열린 ‘전국노래자랑-강원도’ 편이야말로 ‘원조 중 원조’였습니다. ‘동구리’야말로 경연 프로그램이 낳은 깜짝 스타였고요.
실록에 등장한 댄스 여가수 동구리처럼 실록에 이름을 낸 댄스 여가수가 한 분 있습니다. 세종 연간에 활약한 설매인데요.
“1429년(세종 11) 5월 16일 명나라 사신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가무(歌舞)하는 여자 설매 등 8명을… 보냈는데….”
두 달 뒤인 7월 21일 의미심장한 기사가 보입니다. “…창가녀 설매 등 8명 등이 사신을 따라 명나라로 떠났다”는 겁니다.
‘조선판 댄스가수’였던 설매와 관련된 일화가 문헌에 남아 있습니다.
서거정(1420~1488)의 <동인시화>인데요. 즉 설매는 전악서(궁중 잔치와 의식에서 필요한 음악을 담당한 관청) 소속 기녀였는데요. 악사(樂詞), 즉 궁중음악에 맞춰 부르는 노래(시가)를 잘 불렀답니다.
어느 날 서쪽 지방을 순찰하러 떠나는 개국공신 하륜(1347~1416)을 위한 송별 잔치가 성 밖에서 열렸는데요.
이때 설매가 나서 임지로 떠나는 하륜을 위해 노래 한마디를 불러주었습니다.
“그대에게 다시 한잔 술을 권하노니 서쪽으로 양관을 나서면 벗들도 없을 것일세.”
설매의 노래를 들은 고관대작들이 “캬~” 하는 감탄사를 연발했답니다. 이 노래가 당나라 시인 왕유(699?~759)가 타지로 떠나는 친구에게 보낸 전별시의 구절(서쪽으로 양관을 나서면 벗들도 없다·西出陽關無故人)이기 때문입니다.
설매의 신분이 비록 기녀였지만, 그래도 장악원 소속이었잖아요. 허다한 중국의 시가를 외우고 있다가 분위기에 맞게 노래를 부를 정도의 교양과 학식 그리고 재치를 겸비한 댄스가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임금 앞서 속요 부르고, 무관을 욕한 여가수 조선조 성종(재위 1469~1494) 연간에 활약한 여가수가 또 한 분 있습니다.
함경도 영흥 출신 기녀 소춘풍인데요. 어느 날 소춘풍이 성종이 베푼 연회에서 기막힌 노래 3곡을 불렀습니다.
먼저 문관 앞에서 부른 노래는 “고금을 통달한 명철한 군자를 두고 어찌 무식한 무부(무신)를 따라가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노래를 듣던 무신들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겠죠. 소춘풍은 이번에는 무신을 달래주는 노래를 불렀답니다.
“앞의 말은 그저 웃자고 한 농담이요…. 문과 무가 일체임을 나도 알고 있으니 어찌 용맹스러운 무사를 따르지 않겠소.”
그러면서 소춘풍은 이때 문관과 무관을 모두 아우르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제나라(문관)도, 초나라(무관)도 대국인데, 소국인 등나라(소춘풍)가 그사이 끼었으니 제나라도, 초나라도 섬겨야죠.”
소춘풍은 문무 양반을 다 섬기겠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소춘풍은 임금 앞에서 고상한 궁중음악이 아니라 민간에서 유행된 속요(대중가요)를 불렀습니다.
조선의 가왕 ‘이세춘 밴드’ 10년간이나 조선의 가요계를 휩쓸었던 인물이 있습니다. ‘18세기 가왕’이라 할 수 있는 이세춘입니다.
문인 신광수(1712~1775)의 <석북집> ‘증가자 이응태’조를 볼까요.
“당세의 가호(歌豪) 이세춘은 10년간 한양 사람들을 열광시켰지. 기방을 드나드는 왈짜들도 애창하며 넋이 나갔지.”
이세춘은 허투루 볼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통용되는 용어인 ‘시절가조(時節歌調)’, 즉 ‘시조’라는 말을 만들어낸 분이거든요.
새 장르의 노래를 뜻하는 ‘시조’는 기존의 노래를 뜻하는 고조(古調)와 구별되는 개념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이세춘은 기존의 창법과 전혀 다른 레퍼토리를 구사한 가수였던 거죠.
무엇보다 이세춘은 ‘솔로’가 아니라 ‘밴드가수’였습니다. 이름 붙이자면 ‘이세춘 밴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남자가객 이세춘과 기생 추월·매월·계섬 등 여성가객, 그리고 금객(琴客) 김철석이 초당에 앉아 거문고와 노래로 밤이 이슥해 갔다.”(<청구야담> ‘유패영풍류성사’)
남성 보컬(이세춘)을 중심으로, 거문고 주자(김철석), 여성보컬(추월·매월·계섬) 등이 그룹활동을 했다는 겁니다.
18세기 연예기획사 그런데 이세춘 같은 전문 아티스트들과 같이 언급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세춘 밴드와 함께 활동했던 문사 심용(1711~1788)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가수나 거문고 연주자 같은 전문 아티스트는 아니었고요. 이른바 ‘풍류남아’를 자처했던 인물입니다.
특히 이세춘 같은 가수들을 돌봐주는 일종의 후원자 역할을 했습니다. 시쳇말로 연예기획사 대표라고 할까요.
이세춘 밴드의 멤버였던 여가수 계섬도 대단한 보컬가수였습니다.
“계섬이 노래를 할 때 마음은 입을 잊고, 입은 소리를 잊어 소리가 짜랑짜랑 울려퍼졌다”(<효전산고> ‘계섬전’)고 전합니다.
지방 기생들이 서울에 와서 노래를 배울 때는 모두 계섬한테 몰려들 정도로 ‘전국구 스타’가 됐습니다.
가수 지망생들의 ‘보컬 트레이너’가 된 겁니다. 계섬은 정조(재위 1776~1800)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1735~1816)의 회갑연에 초대받아 ‘오프닝’을 장식하기도 했답니다. 계섬은 훗날 ‘심용의 기획사’에 들어가 이세춘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이세춘 밴드의 또 다른 멤버인 추월은 춤과 미모로 유명한 ‘댄스가수’였답니다. 추월은 공주 기생 출신이었는데요.
궁중의 상방(尙方·임금의 의상을 책임지던 관청)에 들어갔는데, 풍류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제3의 멤버인 매월은 종친인 이익정(1699~1782)의 문하에 있다가 이세춘 그룹의 일원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김철석(1724~1776)은 당대 최고의 ‘거문고 연주자’였습니다. 별명이 ‘철돌(鐵突)’이었다죠.
이세춘 밴드의 평양 게릴라 콘서트 어느 날, 기획사 사장격인 심용이 이세춘 밴드 멤버들에게 “평양 한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합니다.
“평안감사가 대동강 위에서 잔치를 벌이는데, 평안도 모든 수령과 이름난 기생들, 명가수들이 다 모인다는구나.”
긴가민가하던 멤버들이 심용의 다음 한마디에 모두 손뼉을 치며 호응했습니다.
“심회(心懷·스트레스)를 크게 발산할 수 있고, 전두(纏頭·개런티)로 비단과 돈을 많이 받을 것이니….”
이때의 평양 이벤트는 예조판서를 지낸 신회(1706~?)의 평안감사 시절(1765~1766) 연 대동강 잔치로 추정됩니다.
실은 초대받지 않은 공연이었습니다. 일종의 ‘게릴라 콘서트’였죠.
이세춘 밴드는 ‘금강산 유람’을 다녀온다고 소문낸 뒤 평양에 잠입했습니다.
잔칫날 아침 배 한 척을 빌려 차양막을 치고, 좌우에 주렴을 드리웠습니다. 멤버들을 태운 그 배는 능라도와 부벽정 사이에 숨겨두었습니다. 잔치의 시작을 알리는 풍악이 울리고 돛배가 강물을 뒤덮었습니다.
평안감사는 층배에 높이 앉아 잔치를 즐겼습니다. 모처럼의 구경거리에 성머리와 강둑은 인산인해를 이뤘습니다.
이때 심용이 노를 저어 평안감사의 층배가 보이는 곳에 배를 멈췄습니다. 그리곤 저쪽에서 검무를 추면 이쪽에서도 검무를 추고, 저쪽에서 노래를 부르면 이쪽에서도 노래를 불렀습니다. 마치 흉내내는 것 같았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히든싱어>일까요. 그 모습을 보던 평안감사 등이 “저 배를 끌고 오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끌려온 배가 평안감사의 층배 머리에 이르자 심용이 주렴을 걷고 껄껄 웃었습니다.
사실 심용과 평안감사는 친분이 깊은 사이였습니다. 심용의 정체를 알게 된 평안감사는 넘어질 듯 놀라며 반가워했는데요.
이후 이세춘 밴드와 현지의 평안도 그룹이 치열한 공연 배틀을 벌였습니다. 배틀의 승자는 이세춘 밴드였습니다.
아무래도 서울에서 활약 중인 이세춘 밴드의 공연이 서도(평안도) 그룹과 수준차가 났겠죠. 개런티도 깜짝 놀랄 만큼 받았습니다. 평안감사(1000금)는 물론 다른 벼슬아치들까지 거의 1만금에 가까운 돈을 선뜻 냈답니다.
송귀뚜라미, 천상의 목소리 이세춘과 쌍벽을 이루는 가객이 송실솔이었습니다. 하루는 이세춘이 모친상을 당했을 때 송실솔이 조문을 했는데요.
문에 들어서면서 상주(이세춘)의 곡소리를 듣고 이렇게 응수했답니다.
“상주가 계면조로 곡을 했으니 문상객은 평우조(일반 곡조)로 곡(哭)을 받는 게 마땅하지.”
그러자 빈소에 모인 문상객들이 웃었다는 이 일화가 인구에 회자했습니다(이옥의 <문무자문초> 중 ‘가장 송실솔전’).
송실솔은 노래를 배울 때 폭포수 밑에서 연습을 했습니다. 1년을 그렇게 하자 노랫소리만 남고 폭포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답니다. 송실솔의 노래는 구슬처럼 맑았고, 연기를 날리듯 가냘프고 구름이 가로걸리듯 머물렀으며, 철 맞은 꾀꼬리같이 자지러졌다가 용이 울 듯 떨쳤답니다. 송실솔의 ‘실솔(??)’은 귀뚜라미와 같은 소리를 낸다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조선판 얼굴 없는 가수 조선의 대표적인 ‘얼굴 없는 가수’는 남학입니다. 당대 사람들은 벽을 사이에 두고 남학의 노래를 들었는데요. 생김새가 추했기 때문이랍니다. 얼굴은 귀신, 눈은 단춧구멍, 코는 사자, 수염은 늙은 양, 눈은 미친개, 손은 엎드려 있는 닭발 같았답니다. 남학은 그러나 타고난 미성의 소유자였습니다.
벽 너머에서 그의 노래를 들으면 여인들의 혼이 흔들리고, 마음이 격동했답니다. 막상 얼굴이 드러나면 여인들이 멍하니 앉아 있고, 때로 깜짝 놀라 울고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답니다(이옥의 <청남학가소기>).
여가수 금향선도 외모는 추악했지만 애절하고 원망하는 듯한 처절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죠. 그의 노래를 듣는 이들은 “끓어오르는 춘정을 감출 수 없었다”고 합니다(안민영의 <금옥총부>). 섹시한 목소리의 소유자였던 겁니다.
절대고음을 자랑하는 모흥갑(1822~ 1890)도 유명합니다. 모흥갑은 ‘설상(雪上)에 진저리치듯 한다’는 소리를 들었답니다. 그의 목소리는 ‘고동상성(鼓動上聲)’이라 했는데요. 평안감사 초청을 받아 평양 연광정에서 소리를 할 때 10리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세계를 풍미하는 K팝의 조상들을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I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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