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신간 '보이지 않는 질병의 왕국'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지역의 유능한 판사였던 이반 일리치는 40대 중반 갑자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원인을 찾느라 여러 의사가 진단했지만, 소견은 제각각이었다. 아무리 약을 써도 통증이 줄지 않았다. 고통은 오로지 그의 몫이었다. 온정적이었던 가족도 점차 늘어가는 그의 신경질에 결국 짜증으로 맞대응했다. 주변 누구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매일 밤 고통 속에서, 그리고 고독 속에서 몸부림쳤다. 톨스토이의 중편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거칠게 요약한 내용이다.
미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메건 오로크도 톨스토이의 소설 속 인물인 일리치와 비슷한 증상을 겪었다. 대학 졸업 직후부터 칼로 찔러대는 듯한 통증이 팔다리를 아침마다 덮쳤다. 세월이 흐를수록 통증은 몸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그를 괴롭혔다. 남편도, 친구도, 친정 식구도 위로를 건넸으나 아무도 그의 고통을 온전히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통증을 없애기 위해 여러 병원을 전전했다. 일반 내과, 대학병원, 대체의학까지 좋다는 곳은 죄다 찾아다녔다. 특히 대체의학 쪽은 보험 적용이 안 되어 약값도, 치료비도 엄청나게 비쌌다. 카드 빚이 늘어갔지만, 낫기만 한다면 다시 벌 수 있을 거라 그는 생각했다.
수없이 피를 뽑고, 자기공명영상검사(MRI)를 하는 등 다양한 검사를 진행했지만, 진단명은 두드러기, 단핵구증, 하시모토병 등 제각각이었다. 근대 서양의학과 대체의학을 넘나들었지만, 상태는 약간 호전됐다가 다시 심해지기를 반복했다. 의사들은 마음의 문제 쪽으로 결론을 지으려고 했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내 병력에 대해 하나도 모르면서 통증이 사실은 마음의 문제라고 보고 싶어 한다는 것에 낙담했다."
실제 마음의 병이라고 하기에는 증상이 너무 구체적이었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통증이 찾아왔고, 어떤 날은 손에 힘이 없어 잼 뚜껑을 열 수 없었으며 수표에 이름도 쓸 수 없는 상태가 됐다. 병은 시인이기도 한 오로크에게서 단어들마저 앗아갔다. '봄'이 떠오르지 않아 겨울 다음에 오는 계절이라고 에둘러 말하기도 했다. 늘 머리가 명징하지 않았고, 희뿌연 안개가 낀 듯한 브레인 포그 현상에 시달렸다.
가까운 사람들도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의 통증과 각종 신체 기능 저하 속에 그는 글을 쓰며 자신을 다독였다. 그 결과물이 최근 번역돼 출간된 '보이지 않는 질병의 왕국'(부키)이다. 책은 20여년에 걸친 오로크의 '투병기'다.
오랜 검사와 진단 끝에 저자는 자가면역질환에 시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몸에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침입하면 공격해 퇴치하는 T세포나 B세포가 정상 세포를 공격하면서 발생하는 면역계 질환이다. 보통 유전의 영향을 크게 받지만, 음식이나 화학물질 등 환경적 요인도 작용한다. 기본적으로 몸의 항상성이 깨지고, 호르몬 균형이 무너지면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런데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진드기에 의해 발생하는 라임병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항생제 치료 등을 단행했지만, 그 병을 고쳐도 체위성기립빈맥증후군, 엘러스단로스증후군 등 여러 질환이 계속 그를 찾아왔다. 고치면 새로 생기고, 또 고치면 다시 나타나고. 병은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며 그의 삶 속으로 파고들었다.
400여년 전 영국 시인 존 던은 "병이 다채로워 비참하다"고 말했다. "아픈 것은 가장 큰 불행이고 아픔의 가장 큰 불행은 고독"이라고도 했다. 저자가 느끼는 비통함도 던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가장 아팠던 시절, 병을 고치기 위한 일은 무엇이든 공동체가 아니라 당사자의 몫이라고 다들 믿고 있어서 외로웠다"고 했다.
저자는 책에서 미국 의료제도의 허점도 짚는다. 보험적용이 안 되는 대체의학, 자기 전공 분야밖에 모르는 전문의들의 실체, 명확한 검사 결과에만 의존하는 현대 의학 시스템, 의대 본과 3년 후 점점 줄어드는 환자에 대한 의사들의 관심과 관료화되어가는 병원 등을 비판한다.
"미국 의료계는 나를 진단하는 일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수년간 내 탐구를 가로막았다. 내 병을 인정하는 대신, 내 몸을 의료계가 아는 확실한 질병을 앓는 순종적인 그릇처럼 다루고자 했다. 복잡한 병이 깃든 내 몸은 생물학적 요소뿐 아니라 생애적 요소로 구성된 장소인데 말이다."
진영인 옮김. 440쪽.
buff27@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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