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자들의 세계사, 음모론 [朝鮮칼럼]
토착왜구가 아니라
토착獨구·토착露구 극성
13년전 공군 1호기 추락 사고 땐
러시아 음모론이 지배
천안함 음모론과 놀랍게 닮아
초등생의 이분법적 세계관
좌건 우건 지적 게으름 경계를
2023년 유럽 최고의 관광도시로 뽑힌 바르샤바에는 볼거리가 많다. 낯선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볼거리도 많은데, 단연 돋보이는 것은 음모론이다.
호텔에 짐을 풀고 공영방송 ‘폴란드 티브이(TVP)’를 켜니 야당인 ‘시민 강령’의 지도자이자 폴란드 총리, 유럽연합 행정수반을 지낸 도날드 투스크(Donald Tusk)를 공격하는 다큐를 방영하고 있다.
“나는 단치히 사람입니다(Ich bin ein Danziger).” 폴란드 총리 자격으로 독일을 방문한 투스크가 독일어로 자신을 소개한 문구이다. 과거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 영토 분쟁이 그치지 않았던 그단스크를 단치히로 바꾸어 말하는 이 영상을 반복해서 틀어주는 이유는 분명하다.
야당 지도자인 투스크는 독일의 이해를 위해 폴란드의 영혼을 팔아먹는 ‘토착독구(獨寇)’라는 것이다. 또 다큐는 투스크 외할아버지의 유대계 성을 넌지시 공개함으로써, 보수 유권자들의 반유대주의에 기대려는 조급함도 보인다.
똑같은 공영방송이 1년 전에는 ‘바르샤바의 우리 사람’이라는 다큐에서 정상회담 당시 푸틴과 웃으며 악수하고 포옹하는 투스크의 모습을 클로즈업하면서 ‘토착로구(露寇)’로 몬 적이 있다. 투스크가 독일과 러시아에 번갈아 가며 민족의 영혼을 팔아먹은 민족 배반자라는 음모론으로 극우 가톨릭 민족주의 정당인 ‘법과 정의당’은 재미 좀 봤다.
긴 목록의 음모론 가운데 폴란드 정치의 공론장에서 가장 지배적인 것은 스몰렌스크 음모론이다. 2010년 4월 10일 러시아의 스몰렌스크 공항 옆 숲에 폴란드 공군 1호기가 추락하면서 음모론은 시작된다.
공군 1호기의 추락으로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 내외, 국립은행 총재와 다수의 국회의원, 합참의장을 비롯한 고위 장성 등 96명의 폴란드 정치 엘리트들이 몰살됐다. 이들은 카틴 숲에서 스탈린의 비밀경찰이 2만2000명의 폴란드군 장교와 지식인들을 학살한 카틴 학살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탔다가 희생되었다.
면밀한 현장 조사와 블랙박스의 기록을 토대로 작성된 장문의 정부 보고서는 사고 원인을 분명하게 적시했다. 짙은 안개와 악천후, 러시아 지방 공항과 러시아산 투폴레프 공군 1호기의 낮은 기술 수준, 조종실에 들어온 공군 참모총장의 회항 불가 명령과 조종사의 압박감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고가 발생한 지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집권 여당을 지지하는 극우적 반러 가톨릭 민족주의자들 사이에는 러시아 음모론이 지배적이다. 폴란드의 민족 엘리트들을 말살하기 위해 러시아 간첩이 대통령 전용기에 폭탄을 설치했다는 식이다.
음모론의 막가파 상상력은 러시아 간첩이 비행기에 접근하기 어려우므로 내부의 첩자가 반드시 있기 마련인데, 그가 누구냐라는 질문으로 곧장 비약한다. 그들은 바로 폴란드 민족을 음해하려는 외세와 결탁한 매국노들이라는 정답이 준비되어 있다.
야당의 주류인 친서구적인 리버럴이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토착독구(獨寇)’나 ‘토착로구(露寇)’로 몰리기 십상이다. 폴란드의 극우 가톨릭 민족주의자들이 벌이는 이 민족주의 음모론은 한국의 자칭 진보 인사들이 펼치는 ‘토착왜구(倭寇)’ 놀이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폴란드 극우의 스몰렌스크 음모론은 한국의 자칭 좌파의 천안함 음모론과 희한하게 닮았다. 이들은 티벳이나 신장 위구르의 소수 민족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학살조차 미 제국주의의 음모와 선전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빵을 달라’며 거리로 나선 노동자 봉기를 서양 제국주의의 선동과 음모라고 몰아세웠던 동유럽 공산당의 음모론과도 닮았다.
극우파의 광주 음모론도 만만치 않다. 반공주의자 지만원의 ‘북한군 광수’설은 광주를 비롯한 남의 민주화 운동은 전부 북이 지도했다는 북한의 민주기지론과 닮은꼴이다. 그는 자신의 ‘북한군 광수’설이 북의 주장과 같은 노선이라는 점을 깨닫지도 못한 것 같다.
음모론이 언론에 재갈을 물려 공론장이 활성화되지 못한 독재의 유산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음모론자들의 지적 게으름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들이 상상하는 세계는 나쁜 적들 때문에 세상이 이 모양이라는 마니교적 이분법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초등 세계사 수준이다.
자기 성찰적 정치의 지평에 설 때, 적의 적은 내 편이 아니라 나의 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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