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특사 안 만난 김정일, 현정은 방북 막은 김정은...北의 토사구팽

이하원 논설위원 2023. 7. 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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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에서 2조원 등 챙기고
정몽헌 20주기 추모 방북 막아
전략 차원서 활용 가치 없어지면
가차없이 버리는 北에 환상 깨야

현대그룹에서 2조원 등 챙기고

정몽헌 20주기 추모 방북 막아

전략 차원서 활용 가치 없어지면

가차없이 버리는 北에 환상 깨야

사망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조문차 평양을 방문중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왼쪽)이 지난 2011년 12월 26일 금수산기념궁전을 찾아 후계자로 알려진 아들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게 조의를 표하고 있다./AP 연합뉴스

김대중 대통령이 퇴임을 앞둔 2003년 1월 임동원 특보를 평양에 파견했다. 북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 이후 미·북 관계 악화를 막으려는 목적이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앞으로 쓴 친서도 쥐여 보냈다.

DJ는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친분을 쌓아온 김정일이 자신의 마지막 특사를 만나 줄 것으로 생각했으나 오판이었다. 김정일은 임 특보가 사흘 동안 평양에 머물렀음에도 ‘지방 현지 지도’를 핑계 대고 만나지 않았다.

DJ는 크게 분노했다. 김정일에 대한 배신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DJ는 이때의 상황을 자서전에 남겼다. “나는 크게 실망했다. 임기 말 나를 대신해 찾아간 특사를 만나 주지도 않은 것에 화가 났다.” 1356쪽의 두 권짜리 DJ 자서전 중에서 김정일을 겨냥해 실망과 분노를 표현한 것은 이 부분이 유일하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한 인사는 “DJ 임기가 끝나가면서 이용 가치가 없어지니 김정일이 바로 관계를 끊은 것”이라고 했다.

2018년 4월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의 아들 김정은은 자신을 환대해 준 문재인 대통령에게 감사를 표했다. “하나의 핏줄과 역사, 문화와 언어를 가진 북·남은 본래처럼 하나가 돼 끝없는 번영을 누릴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이듬해 미·북 하노이 회담이 결렬됐다. 그러자 그 책임을 우리 쪽에 돌리며 입에 담기도 어려운 저질 비방을 늘어놓았다. 문 대통령을 겨냥해서 “웃겨도 세게 웃기는 사람”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仰天大笑)할 노릇”이라며 비아냥거렸다.

북한 체제 유지에 도움되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걷어차는 김씨 일가의 본질은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 사망 20주기를 앞두고 다시 확인되고 있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다음 달 4일 남편 정 회장의 20주기 추도식을 금강산에서 하려고 했으나 거부당했다. 방북 요청을 하려 한다는 보도가 나오자마자 북한 외무성이 나서서 “남조선의 그 어떤 인사의 입국도 허가할 수 없다”고 쐐기를 박았다. 그동안 남북 관계에 관여해 온 아·태 평화위, 조평통이 아니라 외무성을 동원해 “검토해 볼 의향도 없다”고 한 점도 눈길을 끌었다.

현 회장은 2018년엔 정몽헌 회장 15주기 때 방북, 금강산에서 추도식을 하고 돌아왔다. 당시 북 관계자를 통해 김정은의 “(정 회장) 추모 행사를 잘 진행하고, 적극 협조하라”는 전언도 받았다.

하지만, 핵·미사일 첨단화에 성공한 김정은이 대결 태세로 전환하면서 북한과 특수 관계였던 현대그룹의 현 회장도 한낱 ‘그 어떤 인사’로 격하됐다. 현대와 맺은 관계에 종언(終焉)을 고했다고도 할 수 있다.

돌이켜 보면, 북한은 1998년 정주영 회장의 1001마리 ‘소 떼 방북’을 시작으로 현대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북한은 1990년대 후반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증언한 대기근과 그 후유증으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이때 현대가 4억5000만달러를 국정원 계좌를 통해 북에 비밀리에 송금, 쪼들렸던 김씨 일가의 숨통을 틔워줬다. 정주영 회장이 설립한 현대아산은 대북 투자 명목으로 최소한 15억달러를 썼다. 요즘 환율로 환산하면 약 2조원의 거액이다.

현대아산은 북의 금강산 관광객 사살(射殺),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으로 대북 사업이 정지돼 명맥만 겨우 잇고 있는데 북한은 인도주의 차원의 추도식도 불허했다.현대가 25년에 걸쳐서 북한에 이용당하다가 ‘팽’ 당한 것은 김정은 체제의 본질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로 남을 것이다.

현대처럼 김씨 일가에 초대형 사기를 당하는 기업이 다시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북한 지원부’로 비판받는 통일부가 환골탈태를 위해 해야 하는 첫 번째 과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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