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7월 15일 ‘공돌이들’, 반란을 시작하다[박종인의 땅의 歷史]

박종인 선임기자 2023. 7. 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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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 공화국 대한민국⑦ 제1차 원자력학술회의와 과학기술처
1959년 7월 15일은 대한민국 과학계에 큰 획을 그은 날이었다. 문교부와 학술원이 후원한 ‘제1차 원자력학술회의’가 서울 동숭동 서울대학교 대강당에서 열렸다. 제목은 원자력이지만 이 학술회의는 과학기술계 다양한 분야 학자 600여 명이 참석한 종합학술회의였고 공화국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래 최대 규모 과학기술 학술회의였다. 전날인 7월 14일 당시 양주 공릉리 서울공대에서 열린 연구용 원자로 1호기 기공식을 계기로 열린 이 학술회의에서 과학-기술학계는 원자력 종합개발정책과 과학기술진흥법 제정을 정부에 요구했다. 이들 과학자의 요구는 7년 뒤인 1966년 12월 과학기술진흥법 제정으로 결실을 맺었다./서울기록원

* 유튜브 https://youtu.be/NOTTSBAvJxE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500년 중인(中人)의 반란

역사는 그냥 움직이지 않는다. 방향을 정확하게 읽는 지도자, 방향에 동의하는 인력(人力) 그리고 이들과 함께 현장에서 움직이는 노동력이 결합할 때 역사가 이뤄진다. 조선 500년 동안 과학자와 기술자는 사대부들 멸시 속에 중인(中人) 내지 천민 취급 받으며 살았다. 국부(國富)와 민생(民生)을 위한 혁신도 찬사는커녕 이름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왕이 탈 가마를 불량품으로 만들었다는 이유로 곤장을 맞고 역사에서 사라진 세종 시대 기술자 장영실이 대표적인 예다.(1422년 4월 27일 ‘세종실록’)

그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국가에 의해 지원을 받고 그 국가정책에 개입하게 된 날이 있다. ‘제1차 원자력학술회의’가 열렸던 1959년 7월 15일이다. 대한민국 과학 정책사는 이날 전과 후로 나뉜다. 500년 중인(中人)이었던 과학기술자들이 반란을 일으킨 날이다.

반란의 전사(前史), 대남송전 중단

1948년 5월 14일 북한이 대남송전을 일방적으로 중단했다. 해방 직후 식민 일본이 운영하던 전력 생산 시설은 발전 설비는 87.6%, 발전량으로는 96%가 북한 지역에 몰려 있었다. 평균 생산 전력은 38선 북쪽 94만2000KW, 남쪽은 4만2512KW에 불과했다.(전성현, ‘한국전쟁 전후 전력 위기와 발전선의 역할’, 인문사회과학연구 23권1호, 부경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 2022) 1948년 미군정이 급히 들여온 2만KW급 발전선 자코나(Jacona)와 6900KW급 엘렉트라(Electra)가 각각 1월과 3월 부산과 인천에 입항했다. 엘렉트라호가 가동되고 한 달 뒤인 5월 14일 북한은 송전을 중단했다. 곧이어 6·25전쟁이 터졌다. 인천에 있던 엘렉트라 발전선은 적에 넘어가지 않도록 자폭했다. 정부는 추가로 투입된 소규모 발전선 4척과 응급 복구된 발전소로 전국에 전력을 공급했다. 이들 발전선이 본국으로 귀환한 때는 1955년 9월이다. 그때까지 대한민국 필요 전력 가운데 3분의 1은 이들 발전선이 생산했다.

2년 틀린 예언, 시슬러와 이승만

1954년 8월 미국이 원자력법을 개편했다. 소련과 냉전 체제가 공고화되자 원자력 독점 정책을 폐기하고 민간 기업에 기술을 이전하고 ‘평화적 이용’을 조건으로 우방에도 기술을 개방했다. 1956년 2월 대한민국은 미국과 ‘원자력 비군사적 이용에 관한 협력 협정’을 체결했다. 이승만 정부는 3월 문교부에 원자력과를 신설했다.

그해 7월 미국 국제협조처 전력고문 워커 시슬러(Cisler)가 대통령 이승만을 찾았다. 한국 원자력의 아버지 이창건(전 한국원자력문화진흥원장)이 당시 대화를 다음과 같이 재구성했다.

“원자력이 만성적 전력난을 해결할 수 있을까?”

시슬러가 가방에서 나무 상자를 꺼냈다. “이만한 상자 정도 우라늄이면 화물 트럭 100대분의 석탄이 만들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무게로 따지면 화석연료의 300만 배쯤 되는 전력 생산이 가능하다.”

이승만이 감탄하며 되물었다. “대한민국도 가능한가?”

시슬러가 이렇게 답했다.

“이 동력원은 석탄이나 석유처럼 땅에서 채굴이 쉽지 않다. 그런데 이는 사람 머리(Human Brain)에서 캐내는 것이다. 고급 과학자와 기술자를 양성하면 대한민국도 가능하다.” “얼마나 걸리겠는가?” 호기심 가득한 이 프린스턴 철학박사 출신 대통령에게 시슬러가 답했다. “20년?”(이창건, ‘한국 원자력 과거 현재와 미래’, 21st century science & technology, 21st Century Science Associates, 2007-2008 겨울 호)

1958년 제정된 원자력법에 따라 이듬해 원자력원과 원자력연구소가 설립됐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미국 지원 속에 1969년까지 국비 131명을 포함해 과학자 모두 322명을 미국에 보냈다.(‘한국원자력연구소30년사’, 1990, p66) 1978년 4월 29일 양산 고리 1호 원자로가 상업 발전을 시작했다. 1956년에서 22년이 지났다. 훗날 한국을 다시 찾은 시슬러는 “2년은 오차 범위 내이니 내 예언이 맞았다”고 우겼다.(‘한국원자력연구소30년사’, p85)

대한민국 원자력 및 과학기술의 초석을 다진 윤일선(1896~1987)./서울대병원 의학역사문화원

미래에서 온 과학자들

윤일선(1896~1987)은 과학자며 의학자다. 대한제국 학무국장 윤치오의 아들이다. 개화기 지식인 윤치호가 5촌 당숙이고 윤보선이 4촌이다.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어릴 적 조선에 돌아온 뒤 교토제국대 의대를 졸업했다. 1929년 경성제대 병리학교실 조교수로 있으면서 교토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많은 조선인 제자를 길렀다. 그 가운데에는 훗날 정읍 구마모토농장 주치의로 일하다 대한민국 농촌 보건의 선구자가 된 ‘조선인이 가르친 조선인 박사 1호’ 이영춘도 있었다.

1937년 윤일선은 윤치호가 준 돈 5000원과 세브란스 예산 3000원으로 미국과 유럽 병리학계를 견학했다. 윤일선은 미국 버클리에 있는 ‘어네스트-로렌스 연구실’ 풍경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중성자가속장치 사이클로트론 앞에서 윤일선은 ‘이 방사선 가속기가 의학 발전에 기여하겠다’라고 생각했다.(윤일선, ‘나의 학문편력’, 1987년 5월 4일 ‘매일경제’)

윤일선은 해방 후 서울대 총장과 원자력원장과 학술원 회장과 원자력병원장을 두루 맡으며 대한민국 원자력계를 설계했다. 1948년에는 미국 프린스턴대 원자연구소에서 아인슈타인을 만나기도 했다.(1948년 6월 16일 ‘조선일보’) 윤일선이 아쉬워했던 중성자가속기의 꿈은 근 50년이 지난 1986년 당시 원자력병원장인 아들 윤택구가 스웨덴제 사이클로트론 가속기를 도입하며 이뤄졌다. 윤일선은 그 이듬해 죽었다.

윤일선처럼, 국가가 없거나 국가 지원이 없었음에도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해방 후 가난한 시대, 이들은 ‘토요일마다 군복을 입고 적선동 문교부 가건물에서 세미나를 하는’ 원자력 스터디 그룹을 만들었다. 1955년 만들어진 이 스터디 그룹 멤버 하나하나가 대한민국 원자력과 과학기술의 아버지들이다. 서울대 교수를 때려치우고 원자력과 과장이 된 윤세원이 가져온 서적 ‘연구용 원자로’가 첫 교재였다. 6·25전쟁 중 대북첩보부대인 켈로부대에서 활동했던 서울공대 졸업생 이창건도 멤버였다. 경무대로 배달된 미국 원자력 관련 많은 문건은 ‘타자 실력과 영문 작성 능력이 뛰어난’ 이창건이 맡아서 처리했다.(‘한국원자력연구소30년사’, p86)

1959년 7월 14일 당시 양주 공릉리 서울공대에서 거행된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 투’ 기공식 뒷 장면. 대통령은 물론 민의원의장(국회의장)과 주요 주한외교사절이 기공식에 참석했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사진 오른쪽 백발)과 초대 원자력원장 김법린(이승만 왼쪽 안경 쓴 사람)이 식을 마치고 걸어가고 있다. /국가기록원

반란의 그날

그렇게 냉전이 만든 미국 원조와 원자력을 알아본 리더 이승만과 미래를 준비 중이던 과학기술자들이 이뤄낸 성과가 연구용 원자로였다. 1959년 원자력연구소 설립과 함께 미국에서 들여온 1호 연구용 원자로 ‘트리가 마크2′ 기공식이 양주 공릉리 서울공대에서 열렸다. 부지는 당시 서울대 총장 윤일선이 확보해 줬다. 1959년 7월 14일이었다. 문명의 씨앗을 발아시킬 ‘제3의 불’이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원자로 기공을 기념해 ‘제1차 원자력 학술회의’가 서울 동숭동 서울대 대강당에서 열렸다. 대한민국 과학계와 기술계가 총출동했다. 갓 출범한 원자력원이 주최하고 윤일선이 회장인 대한민국 학술원이 후원했다. 한국물리학회장 최규남이 선언했다. “한나라 흥망은 그 나라 과학력에 있다.” 대통령 이승만 축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우리나라 장래는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끝 문장은 이러했다. “이 회의가 우리들이 옳은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것으로 생각한다.”(1959년 7월 16일 ‘조선일보’) 당시 서울의대 교수 이문호는 이렇게 평가했다. ‘기술자는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과학계의 나갈 길을 마련할 토대를 만들었다.’(1959년 7월 22일, 23일 ‘조선일보’) 유사 이래 처음으로 나라 흥망을 떠맡은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원자력 종합개발 5개년계획’과 ‘과학기술진흥법 제정’을 정부에 건의하고 회의를 끝냈다.

4·19와 5·16 이후 경제기획원에서 맡았던 과학기술 정책은 7년 뒤 결실을 맺었다. 1966년 12월 김대중과 이만섭을 포함한 의원 13명 발의로 ‘과학기술진흥법’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다. 1967년 1월 16일 박정희 정부는 ‘과학기술진흥법’을 공포했다. 석 달이 지난 4월 21일 서울 정동에서 과학기술처가 현판식을 가졌다. 선비가 500년 지배하던 땅에서 마침내 중인(中人)들 반란이 시작됐다.

제1차 원자력학술회의 개최를 알리는 1959년 7월 3일 ‘조선일보’ 기사. ‘원자로 도입을 계기로 학계, 기술진 총동원’이라는 제목이 의미하듯, 대한민국 과학기술사의 전과 후를 가르는 초대규모 ‘쟁이’들의 모임이었다./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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