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최원준의 음식문화 잡학사전] <18> 갯장어와 하모
- 일제강점기 생산량 모두 日 반출
- 조선에선 유통·판매 금지시켜
- 일왕에 진상… ‘하모’로 더 알려져
- 국내선 1980년대부터 즐겨 먹어
- 장어류 중 가장 고단백 보양식
- 3.3㎝ 살점에 칼집 25번은 내야
- ‘송치기’ 잘하는 명인 대접 받아
꽃이 핀다. 백옥같이 눈부신 하얀 꽃이 핀다. 물안개 짙은 새벽녘, 빗방울 수런거리는 연못 위로 함박하니 꽃 한 송이 피어오른다. 그렇게 전골냄비에서 갯장어 샤브샤브가 부드럽게 익어간다. 세밀하고도 규칙적인 칼집을 넣은 갯장어 한 점, 슬슬 끓어오르는 전골냄비에 넣는다. 전골냄비 속에서 갯장어가 화르르 꽃으로 핀다. 개화하듯 갯장어 살점이 하얗게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단백질 풍부한 보양식
요즘 여름철 보양식의 새로운 강자는 단연 장어류이다. 장어는 몸길이가 기다란 어류로 그 대표적인 것이 뱀장어 붕장어 갯장어 먹장어 등 네 가지가 대표로 꼽힌다. 이들은 모두 단백질 함유량이 많고 유익한 지방 성분이 골고루 분포해 몸을 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그중 갯장어는 다른 장어류보다 단백질 함유량은 많고 지방 함유량은 적으면서 다량의 감칠맛 성분으로 깔끔하고 담백하며 입안에 감도는 풍미가 좋다. 이 때문에 집안 어른이나 소중한 분들께 대접하는 고급 보양 음식으로 인식된다. 주로 샤브샤브나 회로 먹는다.
그러나 갯장어가 대중화된 것은 불과 10~2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이전에는 잡히는 대로 전량 일본으로 보내졌다. 그러니 아직까진 대중적으로 친숙하지 못한 어종이기는 하다. 그래서인지 이즈음까지도 우리 이름 ‘갯장어’보다는 일본 이름 ‘하모’로 널리 통용되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에서 함께 통용되는 갯장어와 하모. 이 두 이름 뒤에는 어떤 역사적 이면이 있을까? 갯장어는 일제강점기 조선 수산물 수탈사의 중심에 서 있던 어족이다. 당시 일본제국주의는 조선 연안의 고등어 청어 고래 대구 등과 더불어 붕장어 갯장어 등의 수산물을 전량 일본으로 반출해 갔다.
특히 갯장어와 새조개 등은 ‘수산 통제 어종’으로 지정해 조선 내에서는 유통·판매를 금지하기도 했다. 이는 ‘조개는 새조개, 어류는 갯장어’라 할 만큼 일본인이 좋아하던 바다 식재료이면서, 스시의 주요 재료로도 활용되었기에 전량 일본 수급을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日에선 천황에 진상되기도
원래 우리 민족은 장어류 먹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뱀처럼 생겼기에 먹기에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일본인 세키자와 아케키요(關澤明淸)가 조선 해역을 조사하여 편찬한 ‘조선통어사정(朝鮮通漁事情)’은 “갯장어는 경상도 등 곳곳에서 서식하는데 사람들이 잘 잡지 않고, 또 잡더라도 뱀을 닮은 모양 때문에 먹기를 꺼려 일본인에게만 판매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은 장어류를 보양 음식으로, 절기 음식으로 널리 먹었다. 그러다 보니 조선의 뱀장어 붕장어 갯장어는 일본인에게는 ‘주인 없는 노다지’로 보였을 것이다. 조선인에게는 그리 기꺼운 어종이 아니었지만, 일본인들에게 조선 장어는 아주 귀한 식료로 대접받았다.
해방 후에도 갯장어는 갯장어 요리를 즐기는 일본으로 전량 건너갔다. 여전히 갯장어는 일본인이 즐겨 먹는 식재료이면서 국내보다 높은 가격에 일본으로 팔려 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 일본에서 갯장어 장만법을 익힌 국내 요리사들이 갯장어 요리를 선보이게 되고 이후 서서히 우리나라에서도 갯장어를 즐기는 인구가 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이유로 우리나라에서 통용되고 있는 장어 이름이 ‘하모’ ‘아나고’ ‘우나기’ 등이다. 우리의 견아리(犬牙鱺, 갯장어), 해대리(海大鱺, 붕장어), 해만리(海鰻鱺), 사장어(蛇長魚· 뱀장어)의 일본 이름들이다. 주 생산지인 전남 여수 고흥, 경남 고성 등지에서도 ‘하모’라고 부르며, 이는 ‘갯장어’보다 더 널리 불리고 있다. ‘붕장어’보다 ‘아나고’를 더 널리 쓰듯이 말이다.
갯장어는 자산어보에 견아리(犬牙鱺), 속명으로 개장어(介長魚)로 표기했다. ‘개 이빨을 가진 장어’란 뜻이다. 기록에서처럼 개처럼 주둥이가 뾰족하고 이빨이 날카롭다. 성질 또한 사납고 포악하다. 낚시에 걸려 배에 올라올 때면 이따금 어부의 손을 물고 늘어질 정도로 호전적이다.
일본에서 갯장어는 ‘례(鱧)’라 쓰고 하모(はも)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도 하모의 어원은 ‘개’에서부터 유래되었다. 개처럼 잘 ‘문다’고 ‘はむ’, 탐식성이 강해 뭐든지 먹어 치우기에 ‘먹다(食, はむ)’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일본어 ‘하모’의 한자를 들여다보면 ‘물고기 어(魚)’자에 ‘풍성할 풍(豊)’자를 썼다. 그만큼 다양한 음식으로 쓰이고, 그 맛 또한 풍성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일본의 하모 요리서 ‘하모백진’에는 100가지의 하모 요리를 소개하고 있을 정도로 ‘생선계의 요코즈나(일본 씨름 ‘스모’의 천하장사)’라며 즐겨 먹는다. 천황에게도 올렸던 진상품이기도 하다
▮회·샤브샤브 요리로 친숙
일본 간사이(關西) 지역 교토에서도 갯장어를 오래전부터 즐겨 먹었거니와 교토를 수호하는 신에게 바친 것으로도 전해진다. 일본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에서 잡히는 갯장어는 생명력이 강해 먼 내륙지역인 교토까지 활어로 운송할 수 있는 유일한 생선이었다. 그렇기에 싱싱한 상태의 갯장어로 다양한 요리를 해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교토의 큰 축제인 ‘기온축제(祇園祭)’ 기간에는 기온시장의 기모노 상인들이 기모노를 사러 온 전국의 구매자들에게 ‘하모 스시’를 관례처럼 대접했기에 이 축제를 일명 ‘하모 마츠리(갯장어 축제)’로 부르기도 했단다. 이 갯장어는 뼈가 억세고 등지느러미 쪽으로 성가신 잔가시가 살점에 박혀있어 고도의 장만 기술이 필요했고 여간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제맛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탄생한 하모 장만 기술이 바로 ‘호네기리(骨切り)’이다.
갯장어의 배를 가르고 펼쳐서 살점 속에 파묻힌 잔가시를 빠르고 균일하게 잘게 자르는 기술로, 1cm 안에 8~10번 정도의 칼집을 넣어 가시를 끊어낸다. 이렇게 해야 식감이 부드럽고 가시가 씹히지 않아 입속에 이물감이 남지 않는다. 그렇기에 갯장어 살점 한 치(3.3cm)당 25번 이상 칼집을 넣을 수 있어야 비로소 ‘하모 명인’으로 인정받는다. 한국에서는 이 호네기리를 ‘송치기’라고 하는데, 1980년대 중반부터 이 기술이 도입되어 갯장어의 주요 조리법으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호네기리로 장만한 갯장어를 뜨거운 물을 떨어뜨리거나 뜨거운 물에 데쳐 소스에 찍어 먹는 ‘하모오토시’ ‘하모치리’가 일본에서는 최고의 갯장어 요리로 널리 인정받는다. 한국에서는 전골냄비에 각종 채소를 넣은 육수에 샤브샤브로 먹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갯장어 음식. 비록 침략의 역사 위에 교류되었던 음식이지만 이제는 우리 음식, 음식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인간 탐식에 대한 욕망은 경계를 초월하고 시대를 관통한다. 그러하기에 민족과 국가보다 상위에 서는 가치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음식은 생명과도 직결되는 중차대한 존재이기에, 인류의 역사 속 음식문화가 필히 기록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