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따뜻한 돌에 물들어 간 귀를 대던 유년의 삽화
육십갑자(六十甲子) 저편의 저는, ‘베이비붐’ 세대가 모두 그러했을 것이지만, 여름이면 어김없이 발가벗거나 팬티차림의 하동(河童)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직장 일로 도시가 아닌 경전선 기차를 타고 또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 닿는 할아버지 댁에 아주 어려서부터 맡겨져 자랐습니다. 여름이면 저는 고모들이나 동네 형들과 함께 맑고 많은 물이 마을 옆으로 길게 흐르던 냇물에 나가 여름날 온종일을 보내는 하동이었습니다.
그때 마을에 남자아이들이 모여서 헤엄을 치던 ‘큰바베기’와 여자아이들이 모여서 물놀이를 즐기던 ‘작은바베기’가 있었습니다. 마을의 공동 수영장인 셈이었습니다. 나이 많은, 그래봤자 5, 6학년이었지만 형과 누나들이 동생들의 안전까지 책임지는 곳이었습니다. 저는 그 ‘바베기’가 바위란 뜻이란 것을 철이 들면서 이해했지만, 마을에서 구전되어 온 음운변화에 대해서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알든 모르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큰바베기, 작은바베기는 그 당시 우리에겐 여름을 상징하는 선명한 고유명사로 충분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선호하는 유명 고급 수영장 못지않은 ‘핫플’이었습니다. 큰바베기는 크고 높은 바위로 이뤄져 있고 그 아래로 수심이 깊은 물이 흘렀습니다. 작은바베기는 그보다는 작고 낮은 바위로 수심 또한 깊지 않아 여자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안전하게 물놀이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큰바베기에는 수영을 잘해야 도전할 수 있는 제법 높은 곳에 자리한 다이빙 장소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돼야만 형들에 의해 다이빙이 허락되는 장소였습니다. 아래에는 무서운 기분이 드는 시퍼런 물이 흘러 담력을 키우기 좋았습니다. 큰바베기에서 뛰어내리는 일은 그 공동체에서 하나의 성인식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남녀 구분이 뚜렷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수영을 잘했던 막내 고모는 가끔 큰바베기로 와 헤엄을 즐겼으며, 어린 저는 작은바베기에서 땅 짚고 물장구를 치며 놀았으니까요.
어릴 때 그곳 풍경이 저에게 지금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눈이 부시게 새파란 하늘, 햇살에 반짝이며 흘러가는 냇물, 냇물이 흘러가는 먼 곳에서 피어오르던 뭉게구름, 물가 저편에 심어진 미루나무들, 미루나무 이파리를 흔들고 달아나는 시원한 바람, 귀에 물이 들어가면 그 귀를 대던 따뜻하고 둥근 돌, 따뜻해서 자주 낮잠이 들었던 어린 저, 그런 손주를 찾아오신 젊은 할머니. 60년 세월 저편의 기억이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어제처럼 선명하게 찾아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김용택 시인이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라고 했듯이, 제가 여름이면 사무치도록 그리운 것들은 모두 그 물가에 있습니다. 다시 인생을 살 기회가 주어진다면 되돌아가고 싶은 시공간 중의 하나가 그곳입니다.
저는 그 시간과 공간에 대한 오마주로 몇 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동요 가사까지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 공간은 현재 남아 있지 않습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큰바베기 작은바베기는 사라지다시피 했고, 그 냇가에는 물이 말라버렸습니다. 사라졌기에 더욱 소중하고, 소중하기에 잊지 않기 위해 시인은 시를 쓰는 겁니다. 저도 잊지 않기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에 닿기 위해 어제의 많은 것을 송두리째 잃어버렸습니다. 마을이며 가족공동체는 깨어져 버렸으며, 어디든 자연의 모습은 온전히 보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추억인들 온전하겠습니까. 여름철이면 국민의 물가였던 낙동강의 현재 모습을 보십시오. 그 혼탁도와 심한 악취가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죄며 벌입니다.
사실 저는 큰바베기에서 또래의 성인식이었던 다이빙에 도전하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아버지 손에 이끌려 전기가 들어오는 도시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폼’ 잡고 다이빙하는 멋진 모습을 자랑하고 싶었지만, 세월은 60년이나 흘러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껏 작은바베기에서 땅 짚고 헤엄치는 겁쟁이로 남았습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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