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단상] 오염수를 오염수라 부르지 못하고

경기일보 2023. 7. 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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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대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에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달빛이 유난히 밝은 밤, 주인공 홍길동은 책을 읽다가 한숨을 내쉰다.

“나는 어찌하여 일신이 적막하고 부형(父兄)이 있으되 호부호형(呼父呼兄)을 못하니 심장이 터질 것 같구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일은 홍길동전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오염수를 오염수라 부르지 못하는 일이 2023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질 줄이야.

집권 여당의 국회의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를 ‘처리수’라 불러야 한다고 일제히 강변하고 나섰다. 처리수라는 용어는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한 국내외의 반발을 회피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써온 표현이다. 즉, 일본 정부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이런 용어를 쓰다니 호부호형을 못하는 홍길동의 심정처럼 통탄할 노릇이다.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불과 3년 전인 2020년만 해도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는 “일본을 상대로 국제 소송과 가처분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고 했고 성일종 의원은 “대통령이 즉시 나서 일본 정부에 강력한 우려를 전달해야 한다”, “외교 채널을 가동해 방류 피해가 예상되는 주변국과 공조해 일본을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정부와 여당의 기류는 올해 3월 한일 정상회담 이후 확연히 바뀌었다. 공교롭게도 윤석열 대통령이 방일 기간 중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대해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국 국민의 이해를 구하겠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당사자인 윤 대통령은 아직까지도 진위를 밝히지 않은 채 침묵하고 있다.

대통령의 뜻이 그래서일까? 정부와 여당은 오염수를 처리수라 부르고, 오염수를 1ℓ 마셔도 된다는 인사를 불러 토론을 하고, 매일 브리핑을 하며 오염수가 안전하다는 인식을 심어 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심지어 오염수 해양 투기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야당과 국민을 향해 ‘괴담을 유포하지 말라’고 윽박지른다.

괴담은 정부와 여당이 퍼뜨리고 있다. 오염수가 마셔도 될 만큼 안전하다면 바다에 버릴 것이 아니라 일본 내에서 소비하면 될 일 아니냐는 질문에는 답을 못하면서 직접 시료 채취를 통한 검증도 없이 일본 정부가 제공한 데이터를 갖고 안전하다는 주장만 되풀이하는 것이야말로 괴담이 아니고 무엇인가.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는 것은 정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고 국가의 존재 이유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투기는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고, 수산업을 비롯한 관련업계에 심대한 타격을 줄 것이 뻔하다. 그런데도 윤석열 정부의 대응은 국민의 기대와 상식에 반한다. 일본에 항의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국민을 겁박하고 있다. 정부의 존재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태도다.

윤 대통령은 과거 인터뷰에서 “일본 후쿠시마 원전은 붕괴되지 않아 방사능 유출이 없었다”고 말한 바 있다. 설마 아직도 후쿠시마 원전에서 방사능 유출이 없었다고 믿고 있는 것일까? 방사능 유출이 없었다면 방류도 문제가 되지 않을 터이니 말이다.

얼마 전 후쿠시마 원전 앞바다에서 기준치 180배의 세슘 범벅 우럭이 잡혔다. 그 사실을 대통령은 과연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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