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의동 칼럼] 정권이 바뀌면 우려가 ‘괴담’이 되는 나라

서의동 기자 2023. 7. 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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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오염수 해양 투기에 대한 안전성 우려를 국민의힘과 보수언론은 ‘괴담 선동’이라고 공격한다. A신문은 지난주 ‘광기의 시간, 팩트가 협박당했다’ 기사로 15년 전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 때 분출했던 ‘광우병 우려’를 소환해 괴담으로 몰았다. 오염수 우려를 ‘제2의 광우병 괴담 선동’으로 등식화하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서의동 논설실장

그런데 이 신문을 비롯한 보수언론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만 해도 ‘광우병 우려’ 보도에 적극적이었다. A신문은 2002년 4월22일자 과학면 ‘인간 광우병-병걸린 쇠고기 먹으면 감염…사망률 100%’ 기사에서 “변종 크로이츠펠트 야코프병에 걸린 사람은 결국 광우병에 감염된 소처럼 뇌에 구멍이 생겨 100% 사망하게 된다”는 국내 의대 교수의 기고를 실었다. 2008년 촛불집회 때 나온 ‘뇌송송 구멍탁’ 구호와 일치하는 주장이다. B신문은 2007년 3월23일자 ‘몹쓸 광우병! 한국인이 만만하니’ 기사에서 “한국인이 광우병에 걸린 쇠고기를 먹을 경우 인간광우병에 걸릴 확률이 미국이나 영국인에 비해 높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는 연구 결과를 보도했다.

2003년 12월 미국에서 광우병 소가 나오자 당시 노무현 정부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금지했다. 그러나 미국이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과 연계해 압력을 넣자 2006년 1월 월령 30개월 미만 뼈 없는 살코기에 한해 수입을 재개했다. 미국은 2007년 들어 수입 범위 확대 요구를 강화했다. 이 무렵 B신문이 발행하는 주간지는 ‘뭐? 미국산 늙은 쇠고기 한국만 먹는다고?’ 기사(2007년 7월4일자)에서 일본은 20개월 미만 쇠고기만 수입하는 것을 들어 “일본 사람들은 사실상 안전한 쇠고기를 먹는데, 우리는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는 쇠고기를 먹는다는 건 난센스”라며 ‘30개월 기준’도 위험하다고 비판했다. 기사는 인간광우병에 대해 “광우병에 걸린 소의 고기를 먹은 사람에게 나타나는데, 이 병에 걸리면 뇌에 구멍이 뚫려 사망한다. (중략) 잠복기도 10~40년으로 긴 편”이라고 해설했다.

A신문은 2007년 8월4일자 사설에서 국내 검역 과정에서 검출된 미국산 쇠고기 척추뼈에 대해 “소의 뇌·눈·척수·내장처럼 광우병을 일으키는 단백질이 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보수언론들은 취재기자 칼럼, 관련 책 소개, 과학특집, 외국 동향 등 다양한 기사로 광우병 우려를 유포했고, 한국 정부의 대응이 미덥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그토록 광우병을 걱정하던 보수언론들이 이명박 정부 들어 논조를 180도 바꿨다. 이명박 정부는 2008년 4월18일 미국산 쇠고기에 대해 30개월 이상은 물론 뇌·척수·머리뼈 등 특정위험물질(SRM)까지 수입하기로 했다. 광우병이 재발해도 정부가 일방적으로 수입중단 조치를 취할 수 없도록 하는 독소조항까지 미국과 합의했다. 식탁 안전을 도외시한 졸속·굴욕 협상에 시민 비판이 거세지자 보수언론들은 ‘괴담 선동’이라고 공격했다.

신문이 특정 사안에 대한 견해를 바꿀 수는 있다. 하지만 중대한 사정 변경이 있을 때로 제한하지 않으면 신뢰를 잃는다. 노무현에서 이명박으로 정권이 바뀌던 이 시기 광우병 우려를 불식시킬 획기적인 연구 결과가 없었음에도 보수언론들 논조는 코페르니쿠스처럼 변했다. 보수가 집권했다는 사정 외엔 이유를 알기 어렵다. 정권이 바뀌면 팩트가 바뀌고, 우려가 ‘괴담’이 되는 게 대한민국인가.

졸속협상 결과에 분노한 시민들이 대거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서자 정부가 뒤늦게 미국과 재협상에 나서 쇠고기 수입기준을 30개월 이하로 낮췄다. 시민들의 저항이 국민 건강권을 지켜낸 것이고, 이로써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불안감은 잦아들었다. 그럼에도 사태의 전말을 편리한 대로 싹둑 잘라 ‘괴담 프레임’을 만드는 것은 부적절하다.

현대사회에서는 ‘기술위험’이 갈등을 유발하는 일이 많다. 그 배경이 되는 과학지식이 불확실하기 때문인데, 광우병도 유래와 잠복기, 인간광우병에 걸릴 확률, 유전적 특징이 인간광우병 발병에 미치는 영향 등에서 여러 가설이 경합 중이다. 이를 감안하지 않고 ‘대중을 계몽하려 드는 전문가주의’는 불신을 증폭시킨다. 계몽에 나선 주체가 신뢰받지 못하면 갈등은 더 커진다(정권을 잡자 오염수에 대한 태도를 180도 바꾼 여권 인사들이 해당된다).

오염수 우려는 과학적 불확실성에 더해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의 미덥지 못한 사고 수습 과정에서 누적된 불신 탓이 크다. ‘괴담’은 불신·불확실성과 한 세트다. 보수가 품격을 지키려면 이 점을 깊이 헤아려야 한다.

서의동 논설실장 phil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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