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엔 폭우, 오후엔 찜통...500년 ‘장마’ 용어 바뀔 듯
5일 전국이 폭우와 폭염이 교차하는 하루를 보내겠다고 기상청이 4일 밝혔다. 4일 밤부터 5일 오전까지는 세찬 장맛비가 퍼붓겠고, 비구름이 걷힌 오후는 찜통더위가 나타나겠다. 보통 비가 그치면 비구름대가 빠져나간 자리를 찬 공기가 채우면서 선선해지지만 5일은 곧바로 더워지겠다. 대기가 불안정한 초여름에 비와 더위가 하루건너 번갈아 나타나는 경우는 많으나, 5일은 오전과 오후 사이에 날씨가 변덕을 부리는 것이다.
기상청은 장맛비가 4일 밤 전국으로 확대한 후 5일 오전까지 이어지겠다고 예보했다. 비의 정점은 4일 밤부터 5일 새벽 사이다. ‘매우 강한 비’의 기준이 되는 시간당 30~60㎜ 이상의 많은 비가 전국 대부분 지역에 내리겠다. 곳에 따라 시간당 70㎜ 이상의 비가 쏟아지기도 하겠다. 4~5일 예상 강수량은 수도권·충청권·전라권과 제주도 50~150㎜, 강원권 50~120㎜, 경상권 20~100㎜ 등이다. 4일 서울을 포함한 대부분 지역에 호우특보가 발효되면서 정부는 위기 경보 단계를 ‘주의’로 상향했다.
산림청은 이날 오후 4시 30분을 기해 전국 산사태 위기 경보를 ‘관심’에서 ‘주의’로 상향 발령했다. 6월 말 시작된 올해 장맛비가 집중된 남부 지방은 그간 내린 많은 양의 비로 지반이 약해진 상태라 산사태가 발생할 우려가 크다. 절대적 강수량과 상관없이 짧은 시간 동안 집중호우가 내려도 토사가 무너져내릴 수 있다. 또 이번 비로 임진강·한탄강 등 경기 북부와 강원 북부 인근 하천 수위가 높아지고, 유속이 빨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5일 오후 비가 그친 다음에는 기온이 큰 폭으로 오르며 폭염이 찾아오겠다. 젖은 대기를 말릴 틈 없이 햇볕이 지표를 그대로 데우며 전국이 습식 사우나에 갇힌 것처럼 덥겠다. 보통은 많은 양의 비가 그치면 시원해진다. 비구름대를 포함한 저기압이 크게 비를 뿌리고 한반도를 지나가면서 북쪽에서 찬 공기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렇게 이끌려온 찬 공기의 양이 적을 것으로 보인다. 비가 그치며 한반도는 곧바로 고기압 영향권에 들면서 구름 없이 맑은 하늘 사이로 햇빛이 내리쬐어 기온을 빠르게 끌어올리겠다.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한낮 기온이 30도 안팎으로 오르겠고, 5일은 경상권, 6일은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최고 체감온도가 33도 이상으로 크게 뛰며 곳곳에 폭염주의보가 발령되겠다.
5일 오후부터 6일까지 짧은 폭염이 끝나고 곳곳에 다시 비가 예고됐다. 7~8일 남부 지방과 제주도에 비가 내리겠고, 8일은 비가 충청권까지 확대되겠다. 9~10일에는 중부 지방에 소나기가 내리겠다.
하루에 폭우와 폭염이 동시에 나타나는 건 기후변화 여파다. 현재 동인도양과 필리핀해의 해수면 온도가 평년보다 높은데 이 경우 우리나라 기온을 끌어올린다. 열대 동태평양 수온이 올라가는 ‘엘니뇨’가 기승을 부리면 우리나라 남부에 폭우를 뿌린다. 최근 해수면 온도 상승과 엘니뇨 발달이 겹치면서 폭염과 폭우가 겹치는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이런 변덕스러운 날씨는 장마가 끝날 때까지 반복될 것으로 보인다. 장마 종료와 함께 집중호우도 멈출 것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최근 기후변화 여파로 장마 이후에 더 많은 비가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서울에 퍼부은 시간당 141.5㎜의 비는 장마가 끝난 후인 8월에 쏟아졌다.
‘장마’는 우리나라에서 1년 중 가장 많은 비가 집중되는 기간을 의미하는데 기후변화 여파로 퇴출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기상청은 2008년부터 공식 장마 시작일·종료일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장마가 끝났다’고 하면 사람들은 이 시점 이후에는 큰 비 피해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장마가 끝나고 장마에 버금가거나 장마철보다 더 많은 비가 내리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장마 종료’ 발표가 오히려 혼란을 불러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올해 4월 기상학회 학술대회에선 처음으로 여름철 강수를 예보할 때 ‘장마’라는 단어를 자제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적절한 단어를 찾기 전까지 장마라는 단어 사용을 줄이고, 객관적 정보인 강수량·강수 기간만 예보하자는 것이다. 작년 10월 ‘기후위기 시대, 장마 표현 적절한가’를 주제로 열린 기상청 회의에서 장마라는 단어를 수정하자는 공식적 논의가 처음 이뤄졌다. 장마가 ‘1년 중 가장 많은 비가 내리는 때’라는 의미를 잃으면서 기상청은 ‘여름철 오랜 비’를 표현할 다른 용어를 찾고 있다. 장마는 순우리말로 500년 전부터 쓰였다. ‘여름철 오랜 비’는 동아시아권의 공통된 현상으로 중국과 일본은 ‘매우(梅雨)’라는 표현을 쓴다. 일각에선 ‘우기(雨期)’ 등 표현이 거론되고 있지만 수백 년간 쓰인 용어를 대체하는 작업이라 시간은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
기상청은 오는 10월 열리는 가을학술대회에서 장마 용어 재정립을 위한 특별 세션을 계획하고 있다. 기상청 관계자는 “기상청뿐만 아니라 학계, 언론, 인문·사회 분야 전문가가 모두 참여해 장마라는 용어를 재검토할 예정”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여름 휴가철’은 보통 7월 말부터 8월 초다. 장마가 7월 중순쯤 끝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년처럼 7월 말 이후에도 많은 비가 내리면 이에 맞는 적절한 용어가 필요하고, 기존 장마 개념에 맞춰진 사회 시스템도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것이 기상청 설명이다.
한편 일본 곳곳에선 예년보다 장마가 빠르게 끝났다. 지난달 25일 장마가 공식 종료돼 예년보다 4일 일찍 끝난 오키나와에선 거센 장맛비 이후 곧바로 폭염이 찾아왔다. 마지막 장맛비는 이틀 전인 23일 내렸다. 이날 비가 내리고도 최저기온은 27도, 최고기온은 30도를 기록했다. 남아 있던 구름이 햇볕을 막아준 24일에는 한낮 기온이 31도로 올랐고, 장마가 종료된 25일부턴 현재까지 최고 32도 안팎의 찜통더위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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