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화이부동] 방송의 비정규직 착취, 이젠 끝장내자

기자 2023. 7. 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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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다. 눈뜨는 게 힘들고 괴롭다.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다. 억울해 미치겠다.” 3년여 전인 2020년 2월4일 청주방송에서 14년간 일했던 이재학 PD가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말, 아니 한(恨)이다. 그는 비정규직 처우개선을 요구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고, 근로자 지위확인소송 과정에서 회사와 동료들로부터 거짓증언 등 부당한 일을 당하던 중 1심 패소 직후 “억울해 미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한국PD연합회는 성명서를 통해 “이러한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PD들의 힘과 지혜를 모아 건강한 방송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을 눈물을 삼키며 다짐한다”고 했다. 실제로 그런 다짐의 목소리가 모여, 80여개 단체·노동조합·진보정당들이 함께 결합한 CJB 청주방송 고 이재학 PD 대책위원회가 출범해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6월22일 이 PD의 노동자성을 인정하고, 이 PD 사망에 대한 청주방송 측 책임을 명시한 진상조사결과서가 발표되었으며, 7월21일에는 가족, 대책위, 언론노조와 청주방송으로 이루어진 4자 대표자회의에서 ‘진상조사보고서 결과 이행과 청주방송 내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합의했다.

다음해인 2021년 5월13일, 청주법원은 이 PD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1심 판결을 뒤집고 청주방송 측 부당해고를 인정하고 고인 사망 전까지 미지급된 임금 전액을 지불하도록 명령하는 내용의 항소심 판결을 선고했다. 이렇듯 뒤늦게나마 이 PD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졌지만, 그가 간절히 원했던 세상, 즉 비정규직이 억울해 미치지 않고서도 정당하게 일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방송 환경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비정규직을 착취해 얻은 이익을 정규직들만 나눠 먹는 방송 환경·구조·관행은 건재하다.

방송은 참 이상한 괴물이다. 세상을 향해선 온갖 정의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는 도맡아 전하고 역설하면서도 그런 정의롭고 아름다운 세상이 방송사 내에서 구현되는 것에 대해선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서니 말이다. 2021년 1월4일 경향신문에 게재된 “비정규직 문제 꼬집으면서 비정규직 외면 ‘그들의 모순’…KBS ‘저널리즘 토크쇼 J’ 프리랜서 계약해지 논란”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들여다보자.

이해 못할 ‘그들만의 모순’

이 기사에 인용된 프리랜서 정모 PD는 ‘저널리즘 토크쇼 J 공식카페’ 등에 “전태일 열사 이야기를 방송으로 만들며, 그 방송을 만드는 노동자들을 부당하게 해고하는 모순이 아무렇지 않게 존재하는 곳이 지금의 KBS”라고 밝혔다.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건만 새삼 “그래도 되나?”라는 의문이 생긴다.

한국방송협회가 2021년 방송의날을 맞아 공모를 열어 ‘온 에어(ON AIR), 세상을 켜는 불빛입니다’라는 표어를 대상으로 뽑자, 비정규직들 사이에선 이런 반문이 터져 나왔다. “그 불빛은 등잔불인가? 왜 자기 자신을 밝히지는 못하는 건가? 방송의날은 정말 정규직 방송인의날로만 생각하는 것인가.” 한 작가가 1년차 시절 겪은 방송의날은 충격이었다고 한다. 아침에 출근했는데 사무실에 불도 꺼졌고, 프리랜서 작가를 빼곤 정직원은 아무도 출근하지 않아 조용했다. 방송사 직원에게는 방송의날은 휴일이었다.

이 방송의날에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전국영화산업노조, 언론노조와 산하 방송작가지부 등이 참여한 가운데 ‘방송 비정규직 프리랜서 노동자 권리 선언’ 기자회견이 열렸다. 방송스태프지부장 김기영은 방송사들이 제작 스태프들에게 근로계약서 미작성, 주 52시간 노동 제한 위반 등으로 기본적인 노동권조차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지적하면서 “(방송의날은) 부정부패와 불법을 기념하는 날이냐”고 물었다.

2022년에 들어서선 MBC의 방송작가 착취가 논란이 되었다. 한겨레 사회에디터 전종휘는 “공영 ‘착취방송’은 보고 싶지 않다”는 칼럼에서 “우리는 지금 <피디수첩> 사태 때 이명박 정권에 맞서며 ‘내가 잡혀가도 제2, 제3의 박성제가 나타날 것’이라던 박성제 사장을 상대로 제2, 제3의 비정규직 방송작가들이 투쟁에 나서는 안타까운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며 “갈수록 치열해지는 방송시장 환경과 회사 경영사정이란 이름의 손수건으로 이들 노동자의 피눈물을 닦을 순 없다”고 했다.

이재학 PD 2주기를 맞은 2022년 2월4일 전국언론노동조합(위원장 윤창현)은 “미디어 현장에 또 다른 ‘이재학’은 없는가”라는 성명을 내고 “왜곡된 고용구조 문제를 방치하는 법과 제도는 그대로이며 새로운 신분구조를 고착화해 을과 병의 전쟁터를 만들어 놓고 최상위 포식자인 미디어 자본은 비인간적인 이윤추구를 멈추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방송의 비정규직 착취는 많은 뉴스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이는 방송엔 거의 보도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방송작가유니온 지부장 김한별은 이렇게 비판, 아니 호소했다. “방송사는 (그렇다면) 공정언론, 언론개혁 이런 이야길 하거나 노동 문제 관련 보도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지 않나. 자신이 노동 착취 주체란 생각을 왜 하지 못하나.”

방송사들이 솔직하게 나오면 최소한 소통이라도 가능하련만 늘 궤변을 늘어놓기 일쑤인지라 그마저도 기대하기 어렵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센터장 김영민은 “(방송사 관계자들이) 방송작가는 프로그램에 너무 중요하고 창의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정규직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다들 하더라. 그렇다면 다른 PD와 기자들은 창의적이지 않다는 뜻인가”라고 되물었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문종찬은 “파리목숨을 만들면 창의적이 될 것이라는 것은 무능하고 악의적인 경영자라는 선언이다. 사회 전체가 분노해야 할 말”이라고 했다.

고칠 뜻 없다면 언론기능 내놔야

그럼에도 방송사들은 내내 그런 분노해야 마땅한 말들만 골라서 해대는 악취미를 갖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여성 아나운서에 대한 차별은 무지막지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다른 면선 선진적인 방송이 이 성차별에선 최악의 후진성을 보여왔으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성 아나운서는 정규직으로, 여성 아나운서는 계약직·프리랜서로 채용하는 성차별이 광범위하게 저질러져 왔음에도 세상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평온하기만 하다. 2020년 기준 MBC 지역계열사에서 남성 아나운서는 정규직 비율이 80%를 넘었지만, 여성 아나운서는 20%대에 머물렀다. 정규직 전환 가능성도 남성에게만 있을 뿐 여성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그 이유라는 게 시대착오적이다.

용기를 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던 대전MBC 아나운서 유지은은 “차별 관행의 저변에는 ‘여성은 젊어야 한다. 웃어야 한다’는 시대착오적 생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라면서 “대중이 그걸 원한다고 하는데, 방송사 경영진이 대중의 취향을 빌미로 취약한 고용구조를 포장하는 것 아닐까요”라고 묻는다. 그런 경영진이 아나운서가 되기를 원하는 자기 딸들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유지은은 “회사에 어린 여자들이 빨리빨리 들어와야지” 하는 인식이 많았다고 했는데, 이는 경영진만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는 걸 시사해준다.

거의 모든 정규직이 공범으로 가세한 비정규직 착취는 ‘모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포퓰리즘 슬로건으론 끝장낼 수 없다. 비정규직에 대한 기만적 대응과 잔인한 무관심만 사라져도 해결의 출구를 찾을 수 있다. 그래야 비로소 신분제를 방불케 하는 정규직·비정규직의 현격한 임금격차라는 본질을 마주 대할 수 있어서다. 그 격차를 줄여나가겠다는 장기적 비전을 제시하면서 그 방향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 그리고 방송·노동 관련 기관들이 그 이행을 감시하고 촉구하고 응징하는 메커니즘을 구축해야 한다.

그간 KBS 정규직 직원은 연봉 수준에서 MBC 정규직 직원의 80% 수준이라며 불만을 표시해 왔다. 그런 KBS에서조차 1억원 이상 연봉자는 2021년 말 기준으로 51.3%에 달했다. 더욱 놀라운 건 아무런 보직 없이 억대 연봉을 받는 직원이 30%가 넘는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비용 절감을 비정규직 착취를 통해 하겠다는 이런 방만·부도덕 경영을 그대로 방치한 채 비정규직의 노예화가 종식될 수 있을까? 이제 적어도 KBS·MBC 등 대표 공영방송만큼은 이 물음에 답하거나 그럴 뜻이 없다면 스스로 언론 기능만큼은 반납해야 할 것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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