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넘나든 건반의 질주…폭우에도 2천500석 꽉 채운 조성진
페달링 없이 담백하게 연주한 헨델…날 선 감정의 구바이둘리나
(서울=연합뉴스) 강애란 기자 = 클래식 음악계에 팬덤을 몰고 온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 헨델부터 러시아의 현대음악 작곡가 구바이둘리나의 곡까지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관객들에게 선사했다.
조성진은 4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전국 순회 리사이틀(독주회)의 시작을 알렸다. 2천500여 석이 일찌감치 매진됐던 좌석은 폭우가 쏟아지는 날씨에도 빈자리 없이 관객들로 꽉 들어찼다. 이날 준비된 프로그램북 1천800부도 공연 10분 전께 매진되며 조성진의 탄탄한 인기를 보여줬다.
2년 전 전국 순회 리사이틀에서는 '한국인 최초 쇼팽 콩쿠르 우승'이란 명성을 안겨준 '쇼팽'에 집중했다면, 이번 리사이틀에서 그는 바로크 음악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다채롭게 채워 넣었다.
이날 조성진이 들려준 곡은 헨델의 '건반 모음곡 5번'과 구바이둘리나의 '샤콘', 브람스의 '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과 푸가', 브람스의 '피아노 소품',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이었다. 바로크 시대의 헨델, 낭만주의 시대에 고전주의 계보를 잇는 슈만과 브람스, 올해 92세가 된 구바이둘리나의 곡을 촘촘하게 배치한 것이다.
무엇보다 시대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헨델과 구바이둘리나 음악의 상반된 매력을 극대화 한 연주가 돋보였다. 곡의 배치도 첫 번째와 두 번째로 나란히 붙여놨다.
공연의 시작을 알린 헨델의 '건반 모음곡 5번'은 지난 2월 발매된 조성진의 신보에 수록된 곡이기도 하다. 이 곡은 원래 하프시코드 모음곡으로 피아노로는 잘 연주되지 않는 편이다. 하프시코드는 피아노가 상용화되기 이전에 쓰였던 건반악기로 현을 뜯어서 소리를 낸다.
조성진은 페달을 사용하지 않고 담백한 연주로 원곡의 느낌을 최대한 살린 연주를 들려줬다. 친숙한 멜로디의 4악장 주제 부분은 건반을 가볍게 툭툭 치며 연주해 습도가 높은 바깥 날씨와 다르게 공연장을 산뜻한 분위기로 바꿔놨다. 뒤이어 이어지는 5가지 변주에서는 양손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직관적으로 들리는 선율을 만들어냈다.
전반적으로 명랑한 느낌을 준 헨델의 곡과는 달리 구바이둘리나의 '샤콘'은 곧 건반 위로 쓰러지기라도 할 것 같은 비장함으로 연주의 시작을 알렸다. 순식간에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조성진은 변칙적이고, 불안정한 느낌이 가득한 연주를 이어갔다.
오른손과 왼손의 연주가 작정하고 불협화음을 내는 듯한 연주는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며 감정을 날 서게 했다. 조성진은 마치 길들지 않은 망아지가 뛰어놀듯 건반 위를 내달리기도 하고, 힘을 잔뜩 줘 동시에 건반 여러 개를 둔탁하게 내리치기도 했다. 마지막 건반을 누른 조성진은 잔음(남아있는 음)을 오래 끌고 가며 곡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비장함 가득하게 곡을 끝마쳤다.
이후 들려준 브람스의 곡들과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은 대체로 빠르고 화려한 기교가 필요한 난곡(難曲)임에도 조성진의 연주에서는 안정감이 느껴졌다.
조성진은 앙코르곡으로 라벨의 '거울' 중 세 번째 곡과 네 번째 곡, 그리고 헨델의 'B플랫 장조 사라방드' 3곡을 선사했다. 관객들은 큰 박수와 환호로 호응하거나 자리에서 일어나 연주에 감동한 마음을 전했다.
조성진은 앙코르곡이 끝난 뒤 무대로 드나들었던 문과 정반대 방향으로 끝까지 걸어가 이날 상대적으로 자기 얼굴을 보기 어려웠던 공연장 오른쪽 관객들에게도 고개 숙여 인사했다. 마지막 퇴장 전에는 객석 앞쪽에서 연주를 지켜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포옹을 했다. 정경화는 조성진의 오랜 멘토다. 두 사람은 2018년 듀오 콘서트 무대에 함께 서기도 했다.
이날을 시작으로 서울, 대전 등 4개 도시를 도는 조성진의 리사이틀은 2개 프로그램으로 나눠 진행된다. 12일 울산 현대예술관에서는 이날과 같은 프로그램으로, 5일 서울 예술의전당과 8일 대전 예술의전당, 9일 부천아트센터에서는 브람스의 '피아노소품',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에 라벨의 '거울'을 들려준다.
ae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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