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아침에 생각한 것들 [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수련이 꽃을 피운 여름 아침에는 기쁜 일이 더 자주 일어나고, 어제보다 오늘이 나아지리라는 예감을 품게 한다. 신록은 우거지고 매미들이 숲에서 맹렬하게 울어대며, 빛들은 어디에나 풍부하게 넘쳐난다. 여름의 즐거움과 보람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진다. 여름 과일들이 본격적으로 출하할 무렵 나는 낙관적 기대로 물들고 자존감은 더없이 상승한다. 여름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이 계절의 풍요함이 인생을 화창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아, 세상은 살아볼 만하다!’고 공연히 중얼거리는 계절도 여름이다. 어린 시절 한여름에 공중에서 타오르는 흰 화염을 쳐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뜨면 빛 속에 드문드문 녹색 반점(斑點)이 생겨나는 게 참 이상했다. 무슨 까닭인지 빛이 넘치면 그 밝음 속에 돌연 그늘들이 생기는 것이다. 나는 여름마다 좀 더 착한 사람이 되리라는 꿈과 함께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먼 고장을 그리워했다.
진짜 실패란 무엇일까
1986년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는 “스물여섯 살이 넘은 사람이 버스를 타고 있으면 스스로 실패자로 여겨도 좋다”고 말했다. 스물여섯 살에 버스를 타고 있다는 게 어떻게 실패의 증표가 될 수 있을까? 이건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는 삶을 비하하는 건 아닐까? 나는 대처의 말에 수긍할 수 없다. 그 말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간에 우리는 어떻게 실패자로 규정되는 것일까를 물을 수 있다.
그 물음 전에 먼저 ‘실패란 무엇일까’를 물어야 한다. 성공이 자기 일에 대한 타인의 인정과 보상, 더 구체적으로 지위, 부, 명성을 얻는 것이라면 실패란 그 반대의 현상일 테다.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분투한 노력이 좌절됐을 때 갖는 감정에 매몰되면 자기에 대한 실망과 무력감이 솟구치고 더러는 분노를 동반한 낙담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우리가 구상했던 인생의 기획이 어긋나고 뒤틀릴 때 사람들은 실패를 직감한다. 실패란 한마디로 상실이고 좌절의 경험이다. 탈락, 실직, 낙방, 이혼 따위에 실패란 낙인이 찍힌다. 노숙자, 실직자,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감옥의 수형자들에게서 실패의 그림자를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패는 인생을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증가시킨다. 우리의 내일이 어떻게 될지를 가늠할 수 없다. 실패의 은유로 ‘어둠’을 호출할 수도 있을 테다. 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때로는 어둠이 필요하고/ 달콤한 어둠에 갇힐 필요가 있다.”(데이비드 화이트, ‘달콤한 어둠’)
인생에는 어둠도 필요한 법
실패를 ‘달콤한 어둠’이 되게 하는 것은 실패에서 어떤 유용성을 찾아내는 행위다. 경제학자인 팀 하포드(Tim Harford)가 쓴 책의 제목은 실패가 성공으로 가는 과정에서 겪는 당연한 일이라는 암시를 담는다. 그 책 제목은 <성공이 실패에서 시작되는 이유>다. 실패란 성공에 이르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시행착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패에 대한 이런 정의는 우리 인생에 ‘때로는 어둠이 필요하다’는 시인의 시구와 조응한다. 대중의 마음을 흔드는 성공의 서사들은 세상에 널려 있는데, 그 서사들은 세상을 이롭게 하는 행동과 활동 그 이상의 비현실적인 성취라는 걸 강조하면서 그 뒤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지운다. 차분한 성찰이 빠진 채 비현실적으로 가공된 성공의 서사에 도취하는 것은 자칫 해로울 수도 있다.
성공을 꿈꾸는 자들이여, 먼저 실패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했는가? 청년 시절, 나는 시립도서관에서 철학책들을 끼고 읽으며 습작 노트에는 시를 끼적였다. 20대 초반에 백수로 지내는 동안 미래는 암담했다. 몇 년째 여러 신문사의 신춘문예 공모에서 잇달아 떨어졌다. 시립도서관 참고열람실의 햇빛 잘 드는 자리에서 시를 쓰는 동안 빈둥거리며 허송세월한다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만 했다. 그들은 나를 ‘한심하다’고 여겼다.
시 쓰기를 당장에 걷어치우고 일자리를 알아봐야 할까. 구두 수선하는 기술이라도 배워볼까 하는 번민 속에서 숱한 밤을 보냈다. 몇 년 뒤 나는 연이은 낙방의 비참과 굴욕을 견딘 끝에 신춘문예에 당선하고, 그 뒤로 마흔 해 동안이나 전업 작가로 살림을 꾸리며 여러 권의 책을 쓰며 살아왔다.
그곳에서 쇠를 달구며 노래하라
우리 인생에서 겪는 가장 큰 실패는 아마도 죽음일 것이다. 인생의 가능성 일체를 거둬가 버리는 죽음보다 더 큰 실패가 있을 수 있을까? 필멸의 존재인 우리가 저마다 품고 있는 이 거대한 실패를 피할 도리는 없다. 그런 까닭에 인생에서 실패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실패학’에서는 실패를 성공의 도약대이니 조금도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고 말한다. 실패는 성공의 일시적 유예이고, 성공으로 향하는 과정의 일부라고 지적한다.
중요한 것은 실패에도 꺾이지 않는 마음을 품는 것이며, 실패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깨쳐야 한다는 점이다. 실패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불꽃 속에서 자신을 태우는 새로운 시도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당신이 실패를 딛고 반드시 성공하고 싶다면 부디 실패의 경험을 미래의 자산이 되게 하라!
돌아보면 우리는 숱한 시행착오를 저지르며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다. 한 번도 실패를 겪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실패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은 분노와 슬픔에서 벗어나 스스로에게 빵을 주고 포도주를 주는 것. 그리고 다시 한번 시도할 기회를 베푸는 것이다. 제 분수에 넘치는 성공을 꿈꾼다면 늘 실패자의 처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노르웨이 국민시인 올라브 H 하우게는 이렇게 쓴다. ‘그곳에서 쇠를 달구고 망치질하며 노래하라.’ 우리를 진정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늘 생에 감사하는 태도, 자기 일에 성심을 다하고 인생의 소소한 덕목을 기르는 것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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